[현장에서] 삼성·미래에셋운용의 치킨게임
(서울=연합인포맥스) 서영태 기자 = 어두운 터널에서 벌어진 치킨게임(Chicken Game).
은색 마세라티와 붉은 플리머스가 서로를 향해 가속하다 충돌하고, 마초 할리우드 배우 제임스 스타뎀과 빈 디젤이 부서진 두 자동차에서 각각 내린다. 액션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 7편의 한 장면이다.
치킨게임은 두 운전자가 담력을 겨루고자 마주 보고 돌진하는 자존심 게임이다. 먼저 핸들을 꺾는 겁쟁이(Chicken)가 지게 된다. 누구도 양보하지 않고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치킨게임이라고 한다.
1960년대 초반 대서양에서는 치킨전쟁(Chicken War)이 벌어졌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서독에서 닭고기 소비가 늘어 미국산 닭고기 수입이 급증했는데, 유럽이 미국산 닭고기에 관세를 매겨 가격을 올린 사건이다. 미국은 독일산 트럭에 보복관세를 부과했고, 미국 내 독일 트럭 판매량은 반토막 났다.
미국은 여전히 수입 트럭에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미국 무역정책 권위자인 더글라스 어윈 다트머스대 교수는 "우리는 치킨전쟁의 유산 속에서 살고 있다"며 "(없애기 쉽지 않은) 관세를 부과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수많은 경제학자가 트럼프발(發) 관세전쟁을 비판하는 이유다. 이들은 미국이 중국 등과 벌이는 치킨게임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불안한 출혈경쟁은 자산운용업계에서도 관찰된다.
상장지수펀드(ETF) 시장 1·2위인 삼성자산운용(점유율 38.2%)과 미래에셋자산운용(34.8%)의 수수료 인하 경쟁이 화제다.
선두 주자로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했던 삼성자산운용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빠르게 추격했고, 현재 시장을 양분하는 두 회사가 가격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미래운용이 삼성운용의 텃밭인 레버리지와 인버스 ETF를 정조준해 수수료를 100분의 1로 낮출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이 알려진 날 삼성운용 ETF 조직이 긴급회의를 열어 맞불 작전 등을 거론했으나 일단은 수수료를 낮추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김우석 삼성운용 대표가 경쟁사에 말리지 말라고 직원들에게 주문했다는 후문이다.
두 회사는 지난달에도 미국 주가지수 ETF 보수 인하 경쟁을 벌였다. 미래운용이 TIGER 미국S&P500 등의 총보수를 파격적으로 낮추자 삼성운용도 하루 만에 수수료 인하로 응전했다.
시장에선 ETF 시장이 급성장하며 운용사 간 점유율 경쟁이 치열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국내 ETF 시장은 2022년 말 78조 원대에서 2년 만에 180조 원대로 급증했다.
하지만 경쟁사끼리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초기 시장을 같이 키우려는 사례도 있다. 지난 2021년,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독일 폭스바겐 임원 회의에 깜짝 등장해 경쟁사의 전기차 판매 계획을 적극 응원했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을 함께 앞당기자는 시그널이었다.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얻는 승리, 부전승(不戰勝)을 최고로 친다. ETF 성장을 주도하는 삼성운용과 미래운용이 치킨게임을 중단하고,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지혜를 발휘하길 업계는 바라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두 회사가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모습"이라며 "이러한 치킨게임은 모두가 다 죽자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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