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헌의 단상] 은행은 왜 주식투자에 소극적인가
(서울=연합인포맥스) 한국 시중은행은 수십조 원 규모의 막대한 자금을 굴린다. 투자처 다변화가 꼭 필요한 이유인데, 정작 자본시장의 핵심인 '주식 투자'에 대해선 유독 몸을 사린다. 단순히 은행의 보수적인 운용철학 때문일까, 아니면 제도적 제약 탓일까. 이 질문은 한국 금융산업의 구조적 한계를 되짚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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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주식시장 직접투자 비중은 전체 자금의 1~2%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연기금(약 12%), 외국인(30% 이상), 자산운용사(10% 내외)와 비교해도 현저히 낮다. 이처럼 은행권의 소극적인 행보 배경에는 1950년 제정된 '은행법'이 있다.
현행 은행법 제37조는 은행이 특정 기업의 주식을 자기자본의 1%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전체 주식투자 총액도 자기자본의 20% 이내로 묶고 있다. 이는 예금자 보호와 금융시스템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은행의 위험자산 투자를 원천적으로 억제해온 장치다.
주요 국가 은행들은 어떨까.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볼커룰(Volcker Rule)을 도입해 상업은행의 자기매매를 제한했지만, 투자은행 부문은 여전히 주식투자에 적극적이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JP모건체이스 등은 상업은행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이후에도 자산운용, 주식 인수, ETF 운용 등 자본시장 기능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강화해왔다. 유럽 주요국들도 은행의 유가증권 투자에 대해 일률적 제한을 두기보다는 자산의 위험도에 따라 차등 적용하는 방식을 적용한다. BNP파리바, 도이체방크, UBS 등은 투자은행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내부 통제를 강화해 자본시장 참여를 지속하고 있다.
국내에서 이런 제도적 한계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0월 은행이 공공기관·지방공기업·SPC(특수목적법인) 등이 발행한 유가증권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은행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은 위험도가 낮은 지방채나 특수채에 대해서는 투자 한도를 완화하자는 취지다. 은행의 수익구조를 다변화하고, 과도한 예대마진 의존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정책적인 시도인데 관심 순위에서 밀려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사실상 소멸했다.
은행의 자본시장 참여 확대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은행들이 주식투자에 나설 경우 시장 급락시 손실이 은행 건전성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이는 예금자 불안으로 이어지고, 금융시스템 전체의 리스크로 확산할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 아울러 특정 기업에 대한 대규모 지분 보유는 이해상충이나 시장 왜곡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은행의 주식투자 확대는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측면의 순기능을 고려해 긍정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의 주요 은행들은 금융위기 이후에도 자산운용, 주식 인수, ETF 운용 등 자본시장 기능을 유지하며 수익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해왔다. 이러한 사례는 건전성 규제와 자본시장 참여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의 금융도 이제는 일률적 금지에서 벗어나, 위험도 기반의 차등 규제와 내부 통제 강화라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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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는 "코스피 5,000시대를 준비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자본시장 활성화를 핵심 국정과제로 천명했다. 이를 위해 상법 개정, 주주권 강화, 외국인 투자 유치,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의 구조적 개혁을 추진 중이다. 은행의 자본시장 참여 확대 당위성도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은행은 더 이상 단순한 예금·대출 중개기관이 아니다. 자산운용과 더불어 디지털금융, ESG금융 등 새로운 역할이 요구된다. 은행권의 주식 투자에 대한 규제 완화가 그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은행의 무리한 투자 확대는 그들의 손실로 이어질 경우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성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일방적인 '금지'보다는 '통제와 조절'을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는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일률적 규제로만 일관한다면, 국내 은행은 글로벌 금융산업의 변화에서 점점 더 뒤처질 수밖에 없다. 위험도에 따라 차등화된 규제, 내부통제 강화, 공공성과 수익성의 균형 등을 전제로 한 제도 개편이 시급해 보이는 이유다. 75년 전 만들어진 틀에 갇힌 채, 은행을 '이자 장사'에만 머물게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시장과 실물경제를 잇는 생산적 금융기관으로 진화시킬 것인가. 그 선택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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