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권의 쿰파니스] '200조 전세대출' 딜레마

2024.10.22 08:40

읽는시간 4

URL을 복사했어요
0

[고유권의 쿰파니스] '200조 전세대출' 딜레마



(서울=연합인포맥스) '농협은 주택담보대출, 모기지론, 주식담보대출, 신용대출 등 모든 가계대출을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신한은행은 금리안전모기지론과 비거치식 분할상환방식을 제외한 주택담보대출, 모기지론, 신용대출 등 대부분의 신규 가계대출을 전면 중단했다'. '우리은행은 가계대출에 대한 본부 심사기준을 강화해 생활자금용 주택담보대출, 주식담보대출 등의 신규 대출을 사실상 중단했다'. '하나은행도 전세자금대출 등 실수요자가 꼭 필요한 자금만 대출해주고 나머지는 중단하기로 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다. 2011년 8월의 한 장면이다. 같은 해 6월 정부는 가계부채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은행권에 연간 목표치 이상으로 가계대출을 취급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은행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출을 늘렸다. 결국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증가율을 낮추지 않으면 고강도 검사에 나서겠다"고 압박했다. "은행들이 이자 장사에 혈안이 돼 말을 안 듣는다"며 날 선 비판도 했다. 금융당국이 목줄을 조여오자 은행들은 꼬리를 내리더니 대출을 아예 중단해 버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13년 전이나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사실상 판박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당시 5월 말 기준 국내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440조9천억원이었다. 은행 이외의 다른 예금취급기관까지 포함한 가계대출 잔액은 612조3천억원이었다. 올해 9월 말 기준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1천135조7천억원에 달한다. 그 사이 2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결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채와의 전쟁'이 더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부채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증가 속도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가파르다는 점에서 이를 억제하기 위한 싸움은 상시화하고 있는 셈이다.

가계대출의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택담보대출과 전세자금대출이다. 대부분이 집과 연관돼 있다. 안정적인 주거지를 마련하기 위한 사람들의 욕망은 생존을 위한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온전히 자기자본으로 안정적 주거생활을 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사실상 없다는 점에서 늘 충돌이 벌어진다. 총량을 관리할 수밖에 없는 당국과 대출을 더 내줘 이자 장사를 하고 싶은 은행, 조금이라도 더 대출받아 좋은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 하지만 땅을 파면 돈이 나오지 않듯 제한된 자원을 좀 더 안정적으로 배분하기 위해선 규율과 목표가 필요하다.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방향이 대출총량을 줄이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방적으로 기존 대출을 회수하는 게 아니라면 그럴 수단과 방법도 없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100% 이하에서 총량을 관리하고, 경상성장률 이하의 범위에서 증가율을 관리하겠다는 게 정부가 밝히고 있는 일관된 목표다. 그런데 가계대출의 상당 비중이 집, 즉 부동산과 연계돼 있다 보니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게 절대 쉽지만은 않다. 그렇다 보니 가계부채 억제의 주 타깃은 결국 주담대와 전세대출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개인에게 대출을 내주라 말라 할 권한은 없다. 자금을 중개하는 은행의 건전성 관리라는 명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담대의 경우 부동산시장의 부침과 시기에 따라 변동은 있지만 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을 통해 꾸준한 관리가 이뤄졌다. 은행의 건전성과 자본비율 등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규율체계이다 보니 어지간하면 약발도 먹힌다. 하지만 최근 논란이 큰 정책대출이나 전세대출은 '서민의 주거 안정'이란 명목을 내세워 설계되다 보니 관리 강도가 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전세대출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다. 우리나라의 전세자금 지원은 1988년 주택신용보증기금이 시작하면서부터다. 저소득 근로자의 주거 안정을 위해 저금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전세자금 대출한도를 최대 1억원으로 확대했고 2009년에는 2억원으로 한도를 더 늘려줬다. 2011년에는 무주택 세대주만 받을 수 있도록 했던 조건도 없애 버렸다. 사실상 갭투자까지 풀어준 셈이다. 2012년 23조원에 불과했던 전세대출은 어느덧 200조원에 육박하는 규모로 늘어났다. 임차인이 좀 더 나은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 역할을 하지만, 그 사이 집값을 끌어올리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2009년 8월 '전월세 지원방안' 발표 이후 정부는 거의 매년 1~2차례씩 전세 안정화를 목표로 한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부동산 급등기에 일부 조건을 걸어 대출 취급이 어렵게 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득 요건과 보증 조건 완화, 금리 인하, 신혼부부 등의 전용 대출 신설 등 좀 더 쉽게 대출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었다. 전셋값이 올라도 그에 맞춰 대출이 용이하다 보니 그로 인해 촉발되는 집값 상승은 당연하다시피 했다. 임차인의 전세대출을 종잣돈 삼은 임대인의 갭투자는 심각한 가격 왜곡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전세대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세대출이 서민들의 주거 안정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게 사실이지만, 이미 관리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커졌다. 전세대출로 인한 유동성 증가가 집값을 끌어올리고 부동산 시장을 왜곡하는 요인이 되는 것과 더불어 현재의 과도한 수준으로 커진 가계부채의 핵심 축이 되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매매가 대비 과도한 대출 취급 제한, 원리금 상환유도, DSR 산정 포함, 공적보증 제한 등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시되고 있다. 물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부 입장에선 쉽지 않은 결정이다. "돈 있는 사람들만 좋은 집에 살라는 것이냐"라는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계부채에도 부동산 시장에도 부담을 주는 요인은 제거할 필요가 있다. 전세대출을 그저 은행이 취급하는 대출상품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의 전세대출은 사실상 '제2의 정책대출'과 다를 게 없다. (경제부장)

pisces738@yna.co.kr



<저작권자 (c)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고유권

고유권

돈 되는 경제 정보 더 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