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불과 넉 달 전 '10만전자'를 꿈꾸던 삼성전자 주가는 '4만전자'의 악몽으로 돌아왔다. 지난 14일에 종가 기준 5만원이 무너졌다. 4만원대 주가는 4년 5개월 만이다. 시가총액은 300조원 밑으로 내려갔다. 스마트폰 경쟁사 애플(약 4천800조원)은 비교 불가 대상이 된 지 오래고, 반도체 경쟁사 TSMC(약 1천100조원)와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까지 내려왔다. 시총만 놓고 보면 4~5년 전까지 삼성전자 발아래 있던 TSMC다. 격세지감이란 표현을 쓸 만큼 낭만적인 상황은 결코 아니다. 삼성의 위기, 더 나아가 한국 경제의 위기를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여 두려운 마음이 더 크다.
'트럼프 시대'를 맞아 한국 주식시장이 죽을 쑤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정치·사회·경제·문화 어느 한 분야 거를 수 있는 게 없다. 이 중에서 우리 산업 경쟁력에 대한 위기감이 확산하는 게 결정적 이유라고 본다.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등 한국 대표 산업에 대한 위기감이라 시장에 주는 타격은 더 크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이 확정된 이후 불거진 반도체 지원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폐기 우려와 맞닿아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후보 시절인 지난달 25일 칩스법에 대해 "반도체법은 너무 나쁜 거래"라며 "반도체에 높은 관세를 매기면 그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미국에 공장을 세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IRA에 대해 '그린 뉴 스캠(신종 녹색사기)'이라 규정하고 당선 후 이를 폐기하고 아직 집행하지 않은 예산을 모두 환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칩스법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듬해인 2022년 8월 발효된 법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첨단 반도체 제조업을 미국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핵심이다. IRA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인플레이션 완화를 목표로 시행 중인 법안으로 전기차와 재생에너지가 중점 지원 대상이다. 배터리와 태양광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 미국에 투자하면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란 형태로 보조금을 준다.
트럼프의 공언대로 칩스법과 IRA가 폐기되면 국내 대기업에는 재앙이 될 수 있다. 미국에 대규모 공장을 지었거나 짓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반도체),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SK온(배터리), 그리고 현대차·기아(전기차) 등의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들의 시가총액 순위를 보면 트럼프 당선 이후 한국 증시의 추락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은 국내 시총 1~3위 기업이다. 현대차와 기아는 시총 순위 각각 5위, 6위 기업이다.
(서울=연합뉴스)그레그 애벗 미국 텍사스 주지사(왼쪽)가 9일 오전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방문해 전영현(가운데)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남석우 삼성전자 DS부문 제조&기술담당 사장(오른쪽) 등도 동석했다. 2024.7.10. [텍사스주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burning@yna.co.kr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무려 440억달러(약 61조원)를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공장 완공 후 가동하면 64억달러(약 9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받기로 했는데, 이게 무산될 수 있단 얘기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IRA에 따라 올해에만 약 2조6천억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이런 보조금을 장담하지 못하면 더는 미국에 투자할 이유가 없지만, 상당 부분 투자금이 투입됐다는 게 문제다.
트럼프 정부가 칩스법과 IRA를 전면 폐기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있다. 미국이 기술 패권 확보와 고용 창출 등을 위해 만든 법안이란 점에서 자국 우선주의를 강조하는 트럼프의 정책 방향과도 궤를 같이한단 이유에서다. 칩스법의 경우 공화당이 찬성했던 법안이란 점도 근거로 작용한다. 일부 국내 전문가들은 중국에 대한 보호 무역이 더 강화하면서 국내 반도체·배터리 기업 등은 오히려 이익을 볼 수 있단 주장을 펴기도 한다. 세상사 과도한 걱정이 문제라고들 하지만, 낙관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
벼랑 끝에 선 기업들과 달리 정부당국은 뒷짐을 지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보조금 전쟁 때도 세제 혜택 정도에 그쳤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발의한 반도체 특별법만 보더라도 안일함이 묻어난다. 특별법에는 연구개발(R&D) 근로자의 주 52시간 근로시간 제한을 풀고 반도체 업체에 정부가 직접 보조금을 줄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보조금을 당장 지원하는 게 아니라 지급 근거를 마련하는 수준이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반도체 불황에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그리고 트럼프발 악재까지 몰아치는 상황에서 기업 스스로 글로벌 전쟁에서 이겨내라는 무책임한 행태가 반복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산업부장)
chhan@yna.co.kr
한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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