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의 '무제한 돈풀기' 맞을까…실제 풀린 유동성 따져보니
(서울=연합인포맥스) 윤은별 기자 = 한국은행이 비상계엄 사태 이후 많게는 60조 원 이상의 유동성을 공급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왔지만, 이는 실제 공급 규모보다 다소 과장된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정치권에 따르면 한 의원실에서는 지난 13일 한국은행이 지난해 12월 한 달간 47조6천억 원의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으로 유동성을 공급했다는 내용의 자료를 배포했다.
올해까지 포함하면 총 62조6천억 원의 유동성이 RP 매입으로 공급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각에서는 한은이 '무제한 유동성 공급 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RP 매입의 성격 등을 고려하면 이는 실제 공급 규모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 한은 RP 매매로 '실제 풀린' 금액은 9.8조
한은에 따르면 현재 RP 매매를 통해 실제 현재 시중에 공급하고 있는 금액인 순 잔액은 9조8천억 원이다. 유동성을 공급하는 RP 매입 잔액 10조 원에, 유동성을 흡수하는 거래인 RP 매각 잔액 2천억 원을 뺀 숫자다.
이는 비상계엄 사태 전인 11월 말 순 잔액인 9조3천억 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현재까지 RP 매입 잔액도 대체로 5조~25조 원을 나타냈다.
여기에 한은의 또 다른 공개시장운영 수단인 통안채, 통안계정 예치금까지 함께 따져보면 한은은 유동성을 흡수 중인 상태다.
한은은 RP 매매 외에도 통안채 발행과 통안계정 예치를 통해 시중 유동성을 조절한다. 두 수단 모두 유동성을 흡수한다.
지난 17일 기준 통안채 발행 잔액은 110조8천억 원이고, 통안계정 예치금은 2천억 원이다. 이 정도 규모의 유동성이 현재 시중에서 흡수된 상태인 셈이다.
계엄 전인 지난해 11월 말 통안채 잔액이 약 113조3천억 원, 통안계정 잔액이 3천억 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약 3~4조 원 줄어든 수준이다.
연합인포맥스, 한국은행
그렇다면 앞선 40조~70조 원 규모의 유동성이 공급됐다는 주장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는 한은이 실시한 RP 매입을 건마다 누적해 합산한 숫자다.
그러나 RP 매입은 일반적인 채권 매입과는 다르다.
RP 매입은 한은이 채권을 매입했다가 만기일에 다시 금융사에 팔면서 유동성을 회수하는, 사실상 '담보 대출'과 비슷한 형태의 거래라는 점을 고려해야 실제로 공급된 유동성 규모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7일물 RP 매입을 매주 10조 원씩 10번 실시해도, 시중에 풀리는 유동성은 100조 원이 아닌 10조 원인 것이다.
이런 만기 도래로 인한 유동성 회수까지 반영된 RP 매입의 '잔액'이 실제 시중에 공급된 유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 초단기 자금시장 안정 수단…자산 부양과 거리 멀어
RP 매입이 비상계엄 이전에 거의 실시되지 않은 조치라거나, 주식과 부동산 시장을 부양한다는 주장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2003년 이후 한은의 RP 매입 금액을 살펴보면, 2012~2013년 등 일부 연도를 제외하고 대체로 꾸준히 실시돼 온 편이다.
한은이 RP 매입과 같은 공개시장 운영을 실시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초단기 금리를 기준금리와 가깝게 하기 위해다.
금융사 간 초단기 금리가 기준금리와 멀어지면 한은이 결정한 통화정책의 실물 경제 영향력이 떨어지게 되니, 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다.
은행은 한은에 예치하는 지급준비금을 맞추고 남거나 부족한 돈을 단기자금시장에서 빌려오거나 빌려주면서 운용하는데, 이 지준 여건에 영향을 주는 일이 생기면 초단기 금리도 급등락하게 된다.
비상계엄 같은 초대형 이벤트를 비롯해, 분기 말 자금 수요나 지준 적립을 계산하는 마지막 날 빠듯해지는 수급과 같은 계절적 요인에 대응해서도 RP 매입을 실시한다.
예컨대 가장 최근에 실시된 지난 17일 RP 매입의 경우 설 연휴 전 화폐 수요 때문에 지준이 줄어든 데에 대응하기 위해 실시됐다.
보통 만기가 한 달이 되지 않는 초단기 유동성 공급이기 때문에, 단기자금시장 안정 이상의 직접적인 자산 부양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한은 관계자는 "RP 매입과 같은 공개시장 운영의 목적은 초단기 금리가 기준금리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서 "시장 불안 상황에서 한은의 이런 조치로 초단기 자금시장이 안정되면서 전체 금융시장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소비 진작이나 증시 부양까지 영향을 준다고 해석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다"고 했다.
eb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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