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헌의 기업단상] 끝나지 않은 반도체 전쟁
(서울=연합인포맥스) "대만은 미국 반도체 산업을 빼앗아 갔다. 우리는 그 사업을 되찾고 싶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노골적인 자국 우선주의가 대만 TSMC로까지 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거의 모든 반도체가 대만에서 만들어진다. 미국에서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며 또 한번 반도체 패권의 야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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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는 이미 총 65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3개의 반도체 제조공장을 짓고 있다. 그럼에도 반도체 산업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욕심은 끝이 없다. 트럼프 정부는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인 TSMC에 인텔 파운드리사업부 인수를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대만 매체는 "TSMC가 인텔 파운드리사업부 지분 20%를 사들이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TSMC가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이라 평가된다. TSMC의 핵심고객이 미국 빅테크 기업들인 데다, 대만 수출에서 미국 비중이 큰 만큼 회사 자체의 실리만 따지긴 어렵지 않겠냐는 얘기다. 트럼프 행정부는 보조금 계약을 맺은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계약 조건을 변경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다. 동시에 미국 외 반도체 기업을 콕 집어 관세를 부과하겠다고도 했다. 이 대상이 TSMC와 삼성전자다. TSMC의 '인텔 살리기' 참여는 불가피한 수순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인텔은 미국 반도체의 상징적인 존재다. 1980년대에는 세계 메모리 1위 업체였다. 2000년대 들어 삼성전자 등에 밀려 메모리 점유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2010년 이후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들고서는 TSMC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이제는 매년 수십조원의 적자를 내는 부실기업 신세가 됐지만, 반도체 패권을 잡으려는 미국 입장에선 포기하기 어려운 기업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놓고 TSMC를 압박하며 인텔 살리기에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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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이 아니다. 트럼프 정부의 이 프로젝트가 현실화하면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에도 악재가 될 수밖에 없다. 삼성의 파운드리 점유율은 더 낮아질 것이고, 이렇게 되면 빅테크 등 대형 고객사 확보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작년 3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점유율은 9.3% 수준이다. 점유율 65%의 TSMC 파워는 더 막강해질 것이다. 여기에 죽어가던 인텔 파운드리가 TSMC와의 협력으로 살아난다면 삼성 파운드리의 입지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미국이 지금은 TSMC를 타깃 했다지만, 이 불똥이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으로도 언제든 튈 수 있다. 미 정부가 자국 우선주의에 매몰된 이상 보조금 지급을 볼모로 투자 확대나 인텔 살리기 참여 등을 강요할 가능성이 열려 있단 얘기다.
기업 스스로 대응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데, 우리 정부의 대응책은 미적지근하다. 미국발 관세 폭탄에 반도체 전쟁, AI 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제대로 된 산업 정책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탄핵 정국에 한국의 정상 외교가 실종된 이유가 크다고 하지만, 정부 측 고위급 인사의 방미 일정조차 확정된 게 없다. 민간이 먼저 20대 그룹 최고경영자(CEO)로 구성된 경제사절단을 꾸려 트럼프 정부와 접점을 찾는다고 한다. 정상 외교를 축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본과 호주, 인도 등을 보고 있자면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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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리스크가 기업 경영의 발목을 잡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 됐다. 반도체 특별법의 국회 통과가 무산된 것이 비근한 예다. 한국이 반도체 패권 경쟁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보조금 지원안과 주 52시간 예외 적용 등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단 공감대가 컸지만, 이번에도 무산됐다. 최근 한국을 찾은 세계 최대 공동 반도체연구소 imec의 루크 반 덴 호브 최고경영자(CEO)는 적어도 imec이 위치한 벨기에는 근로 시간에 대한 법적 제약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근로시간) 가이드라인은 주 40시간인데 연구원 대부분이 열정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그것보다 훨씬 많이 일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반도체 보조금 지원 문제는 더 심각하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이 매년 수조 원을 들여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데 우리 기업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반도체 전쟁 중에 한국 반도체 기업은 총알 없는 총만 들고 싸워야 할 판이란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강국의 위상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업의 독자생존만을 요구할 것인가.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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