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이모저모] 한국에 메디치 가문이 탄생하기 어려운 이유
(서울=연합인포맥스) ○…목성의 4대 위성에는 특별한 이름이 있다. '메디치의 별'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들 위성을 발견하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붙인 이름이다.
단테,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유럽 르네상스 시대를 일군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세계에, 그리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이다. 예술가들뿐만 아니다. '군주론'의 마키아벨리, 천문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모두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던 학자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메디치 가문을 제외하고 말한다? 세종대왕 없는 조선시대를 말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산업자본과 예술의 관계는 단순한 후원을 넘어 문화의 흐름을 형성하고,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왔다.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 예술을 꽃피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면, 현대 기업들은 '메세나(Mecenat)' 전략의 일환으로 예술에 접근한다. 사회적책임활동(CSR)이자, 브랜드 이미지 강화를 위한 전략이다.
사실 한국 재계의 예술에 대한 접근 방식은 메디치 가문과는 조금 다르다. 메디치가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책 한권 이상 나올 만큼 길어지지만, 한마디로 정의하면 '중세 예술의 양육자'다. 메디치가문은 이른바 떡잎이 다른 예술가와 학자들을 직접 발굴하고 이들을 시대의 리더로 만들어냈다.
예컨대 코시모 메디치는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대성당 돔 건축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해 거부감이 높던 사회 분위기에도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탄생' 등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국내 기업들도 이런 육성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현대차그룹의 지원을 받았고, 팝페라 가수 임형주는 10대 때부터 고(故) 이건희 삼성 명예회장의 역작인 '삼성영상문화사업단'의 발굴로 성장했다. 애석하게도 삼성영상문화사업단은 사업성 부족으로 2000년대 초 해체됐다.
금전적 지원은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메세나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4년 1천772억원 규모였던 기업의 메세나 활동 후원금은 지난 2023년 2천88억원대로 성장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에는 다소 주춤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매년 2천억원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이 자금들은 신진 예술가나 지역 문화 예술 발전, 아동 교육 등을 위해 사용된다.
그럼에도, 협회나 기관을 통한 지원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 먼저 목적성 측면에서 '예술가 육성'보다는 브랜드 이미지 강화와 CSR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메세나 활동은 특정 예술가보다는 특정 문화 프로젝트, 기관, 공공 예술 행사 등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의 창작 과정에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플랫폼과 기회를 제공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이에 앞서 기업의 예술 지원 활동이 자발적으로라기보단 외부로부터 탄력을 받았다는 점도 다르다.
지난 2015년 당시 대통령은 재계 총수들에게 "한국의 메디치 가문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자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을 비롯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본무 당시 LG그룹 회장 등이 있었다. 이듬해인 2016년, 메세나협회 후원 자금은 2014년보다 400억원 이상 늘어난다.
한국메세나협회 제공
문화 예술 대중화 활동의 방법 역시도 한계가 있다. 2만3천여 점의 이건희 컬렉션이 수만 명의 관객을 모으고, 롯데그룹이 백남준, 쿠사마 야요이,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운영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향유와 소비 주체다. 문화·예술의 발전에는 수요와 소비도 중요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위대한 생산과 발전도 동행해야 한다.
다시 메디치 가문 얘기로 돌아가서.
어린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길가에서 노인 얼굴을 조각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신사가 "노인의 이가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마음 상한 미켈란젤로는 이만 다시 부수고 조각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같은 자리를 지나가던 그 신사는 미켈란젤로를 집으로 데려가 양자로 삼고 교육을 지원했다. 그가 바로 로렌초 메디치였다.
(산업부 김경림 기자)
klkim@yna.co.kr
<저작권자 (c)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