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세연의 프리즘] 자사주 소각이 쏘아 올린 삼성금융지주
(서울=연합인포맥스) '아직은 외침' 수준이라도 해도 한국의 밸류업은 진화하고 있다. 지난해 연간 실적을 공개한 대형 상장사들은 이제 밸류업의 근거로 제법 괜찮은 숫자와 계획을 제시한다. 배당 등 이런저런 모호한 근거를 대며 밸류업이라는 단어만 내세웠던 작년 이맘때와는 다른 분위기다.
밸류업에 앞장서고 있는 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삼성이, 삼성전자가 나서주면 좋겠다"고 했다. 삼성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삼성이 하면 다른 기업도 따라 하기 좋은 것도 사실이다.
삼성 오너가 처한 상황 때문인지, LG전자 등 경쟁사의 밸류업 선언이 있을 때도 삼성전자는 조용했다. 이후 내놓은 대책은 대규모 자사주 매입과 소각이다. 통상적으로 주가가 빠질 때마다 내놓던 정책이어서 '4만전자 구하기'라는 다급함으로 읽혔다. 이 영향으로 5만원대를 위협받던 삼성전자 주가는 반등했다.
엄밀히 말하면 삼성전자의 주가부양 정책이지, 중장기 밸류업은 아니다.
이 결정은 얼마 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의 삼성전자 보유 지분 블록딜 매각으로 이어졌다. 두 보험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 금산분리법에서 허용한 한도에 임박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가 부양책이 오버행 이슈를 낳았다.
사실 자사주 소각은 지분율, 더 나아가 기업지배구조를 흔들 수 있는 이벤트다. 총 주식발행수라는 분모가 줄어들면 다른 분자가 가만히 있어도 숫자가 바뀐다. 과거에도 삼성전자의 자사주 소각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삼성생명과 화재는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을 정도로 지분을 줄여왔다.
이번에는 좀 다르다. 그룹 계열사는 물론 상장 보험사 가운데 가장 먼저 기업 밸류업 계획을 시장과 소통한 삼성화재와 맞물렸다는 점에서다.
삼성화재는 매년 일정 자사주를 소각해 2028년까지 5%로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회사의 독립적인 결정이라는 화재의 설명에도 그룹과의 교감 없이 이런 결정을 했을 리 없다는 의구심은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이는 지분구조상 변화를 암시한다.
보험업법은 보험사가 다른 회사의 의결권 있는 주식(출자지분 포함)을 15% 이상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삼성생명은 화재 지분 14.98%를 보유하고 있는데 삼성화재가 자사주를 매각하게 되면 가만히 있어도 규제 수준을 넘게 된다.
그렇다고 삼성전자처럼 주식을 팔게 되면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그룹과 오너의 삼성화재 지배력은 자연스레 줄게 된다. 삼성화재가 보유 중인 삼성전자 지분이 희석되는 동시에 미래에 받게 될 배당도 줄어들게 된다. 삼성으로서는 이점이 없다.
삼성생명은 삼성증권에 했던 것처럼 삼성화재 지분을 줄이기보다 자회사로 편입을 결정했다. 이제 삼성의 모든 금융사는 삼성생명의 자회사로 들어가게 된다. 일원화된 삼성생명은 주주환원을 통해 삼성 대주주 일가가 내는 상속세 부담도 일부 책임져줄 수도 있다.
이쯤 되니 2016년 윤곽이 그려졌던 삼성금융지주의 그림이 조금 더 완성된 느낌이다. 당시 삼성생명은 삼성전자가 보유한 삼성카드 지분 전량을 인수했고, 6월에는 삼성화재가 보유한 삼성증권 지분까지 매입한 뒤 자회사로 편입했다. 비상장사인 삼성자산운용과 삼성SRA자산운용도 삼성생명 밑에 있다.
삼성금융지주에서 다른 금융계열사로 이어지는 금융부문 출자구조가 완성되고, 삼성생명이 금융지주사로 실질적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 밑으로 들어가 삼성 오너는 삼성물산을 통해 금융계열사까지 지배할 수 있다. 2023년 말 일몰될 예정이던 지주회사 과세이연 특례가 내년 말까지로 연기된 상황이기도 하다.
변수는 생겼다. 조국혁신당은 보험사의 계열사 주식 보유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의 보험업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주식 보유량에 영향을 미치는 법안이라는 점에서 '삼성생명법'이라고도 불린다.
보험사의 계열사 주식 보유액을 취득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해 보유 한도를 총자산의 3%로 제한하겠다는 게 이 삼성생명법의 골자다. 19대, 20대, 21대 등 회기마다 반복되는 이 법안은 지금까지의 자사주 소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뒤흔들 수 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삼성생명은 18조원 넘는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해야 한다.
삼성생명의 삼성화재 자회사 편입을 승인할 금융당국과 삼성생명법을 처리할 국회로 공은 넘어갔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삼성금융그룹 보험사들의 행보가 밸류업과 역행한다는 지적에 대해 "밸류업이나 지분 제한이 전면 상충된다고는 판단하지 않는다. 삼성생명이 화재를 자회사로 편입하는 것은 금산분리의 큰 원칙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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