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거버넌스④] 여전히 굳건한 사업지원TF, 변화 물꼬는 텄다
미전실 사라졌지만…'미니 컨트롤타워'가 큰 그림 그려
미래기획단 이어 경영진단실 신설…시너지 '주목'
(서울=연합인포맥스) 유수진 기자 = "컨트롤타워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고 이끌어 나갈지는 회사에서 많은 고려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위원장은 지난 18일 정례회의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삼성의 컨트롤타워 복원 관련 질문에 "여러 차례 말했듯 개인적으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답했다.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지난 3일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처음 소집된 회의였다. 이 위원장은 작년 10월 준감위 연간보고서에서 컨트롤타워 재건을 주장했는데, 이후 해당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이에 대해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이 "경영 간섭"이라고 지적하며 삼성의 컨트롤타워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위원장 발언이 준감위의 권한과 역할을 뛰어넘었다는 게 골자다. 준감위는 삼성의 준법 경영을 독립적으로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남우 회장은 "이 위원장은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는 게 삼성의 거버넌스 개선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것임을 명심하길 바란다"고 일침을 가했다.
◇컨트롤타워, 삼성을 움직이는 힘
'삼성의 거버넌스(지배구조)'는 오너 3세 이재용 회장이 어떤 방식으로 계열사 지분을 보유해 그룹 전반을 지배하는지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삼성이 움직이는 방향을 결정하고 경영 관련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컨트롤타워도 지배구조와 따로 떼놓고 볼 수 없다.
총수의 그룹 지배력 강화, 즉 지배구조 개편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주체 역시 컨트롤타워기 때문이다. 삼성 컨트롤타워 재건의 연장선상에 지배구조 혁신이 있다는 얘기다. 거버넌스 선진화를 주창하는 이남우 회장이 준감위원장의 발언을 '월권'이라고 선 그은 이유도 이 때문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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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경우 과거엔 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이 컨트롤타워였다. 검찰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과정에 불법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 회장과 최지성 전 미전실장,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 등을 함께 기소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미전실은 총수 직할 조직으로서 그룹 전반의 현안을 조율하고 중장기 성장 전략을 짜는 등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했다. '삼성' 이름을 내건 그룹 차원의 경영 판단도 내렸다. 2014년 삼성 화학·방산 사업 매각(한화그룹과 빅딜)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속 가능하진 않았다. 삼성에서 미전실이 사라진 건 지난 2017년 2월이다. 이 회장은 2016년 말 미전실이 국정농단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되자 해체를 선언,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그렇다고 기능까지 없앨 순 없었다. 대관과 홍보를 제외한 핵심 역할을 ▲삼성전자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 ▲삼성물산[028260] 설계·조달·시공(EPC) TF ▲삼성생명[032830] 금융경쟁력 제고 TF 등 계열별 TF에 나눠 맡겼다.
◇정현호가 이끈 사업지원TF…'변화' 요구도
메인은 단연 전자 계열사의 사업지원TF였다. 과거 미전실 출신 인사들이 대거 배치됐다. 이 TF는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로 회사 경영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지난 10년간 삼성전자를 비롯해, 그룹 사업 전반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미니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
인수합병(M&A)과 대규모 투자 등 사업 전략을 구상하고 계열사 간 시너지를 꾀하는 것도 TF의 몫이었다. TF를 이끄는 정현호 부회장이 자연스레 삼성의 '2인자'로 여겨진 배경이다. 삼성에서 정현호란 이름 세 글자는 단순한 부회장 이상이었다.
정 부회장은 1983년 삼성전자 입사 후 주로 재무와 전략, 인사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삼성이 '기술 중심' 회사인 만큼, 최고경영자(CEO) 등 회사를 대표할 수 있는 공식 직책을 갖진 못했다. 삼성전자의 등기임원(사내이사)에 등재된 적도 없다. 전면에 나서기보단 한발 물러나 역할을 하는 게 그의 스타일이었다.
지난해 삼성이 위기를 만나며 조직 안팎에선 '변화'의 목소리가 커졌다. 반도체 사업 등에서 '세계 1위' 경쟁력을 상실한 배경으로 재무·전략 등 관리 조직의 비대화와 이들 중심의 의사결정이 꼽혔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위기를 돌파하려면 기술 인력을 중시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컨트롤타워 부활 '요원'…경영진단실·미래기획단 역할 '주목'
회사는 안정을 택했다.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 등을 고려한 결정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까지 삼성전자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냈던 박학규 사장이 사업지원TF에 합류하며 재무 라인의 위상이 강화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대신 TF에서 반도체 업무를 맡았던 김용관 사장이 DS부문 경영전략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계에선 삼성의 정식 컨트롤타워 부활이 사실상 어려운 만큼 지금과 같은 상태가 당분간 지속될 걸로 예상한다. 이 회장이 올해도 삼성전자에서 미등기임원 신분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검찰의 상고로 말끔히 정리하지 못한 사법 리스크 등을 고려해 등기임원 복귀를 미룬 것으로 보인다.
컨트롤타워의 경우 과거 이 회장이 직접 해체를 선언해 더욱 재건이 쉽지 않다. 자칫 약속을 어기고 말을 바꾸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어 부담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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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삼성전자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사업지원TF를 대체 한다기보단 상호 견제·보완하며 광의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곳이다.
우선 싱크탱크인 삼성글로벌리서치 안에 경영진단실을 신설하고 최윤호 전 삼성SDI[006400] 대표(사장)를 초대 실장에 앉혔다. 최 사장은 미전실 근무 경험이 있고 사업지원TF와 삼성전자 CFO를 거쳤다는 점에서 정 부회장과 결이 유사한 인물로 평가된다. 두 사람은 덕수상고 선후배 관계기도 하다.
삼성에 따르면 경영진단실은 계열사의 요청이 있을 시 경영진단과 컨설팅을 제공하는 조직이다. 해당 회사의 경쟁력 강화가 목적이다. 삼성전자와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 객관적으로 관계사의 상황을 진단하기 위해 사업지원TF가 아닌 글로벌리서치 산하에 뒀다고 한다.
2023년 말 신설한 미래사업기획단도 있다. 그룹 차원의 미래 먹거리 발굴이 주목적이다. 그룹의 주력인 전자 산업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사업 발굴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초대 단장이었던 전영현 부회장이 취임 반년 만에 DS부문장으로 이동한 데 이어, 후임이었던 경계현 전 사장도 작년 말 인사에서 물러나며 연속성이 떨어질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출범 1년 만에 벌써 세 번째 수장을 맞은 셈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고한승 전 삼성바이오에피스 대표(사장)가 그룹의 신사업 발굴을 책임지고 있다.
sj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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