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중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 90일간 상호관세 유예방침을 밝히면서 뉴욕증시 3대 지수가 기록적인 수준으로 급반등했다. 2025.4.10 ksm7976@yna.co.kr
[고유권의 쿰파니스] 국채의 보복과 트럼프 현타
(서울=연합인포맥스)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의 혼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호관세 유예 결정에 9일(현지시간)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이 한 말이다. 속된 말로 '트럼프 쉴드치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패닉에 빠지지 말고 그냥 있으라(주식을 팔지 말라)"며 큰소리치던 트럼프 책사 피터 나바로 무역담당 고문의 희망찬 기대에도 증시는 파랗게 질렸다. 급기야 채권시장은 공포 속 투매의 연속이었다. 트럼프가 '백기'를 들고서야 증시는 역대급 폭등세로 돌아섰다. 나바로는 '거봐 내 말이 맞지'라고 허풍을 떨겠지만, '당신 말과는 반대로 정책을 돌렸더니 반응한 것이야'라고 월가에서는 받아칠 법하다.
트럼프는 이번 상호관세 유예 결정을 '유연성'이란 말로 설명했다. 공포에 휩싸였던 금융시장이 반등한 것을 두고 "꽤 큰 변화다"라면서 "유연해야 한다"고 했다. 액면 그대로라면 올바른 선택이다. 하지만 시장은 트럼프의 '유연성'을 반기면서도 불쾌함은 숨기지 않는다. "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조언하고 촉구했음에도 그는 역대급 상호관세 부과 조치에 서명했다. 그러다 시장이 붕괴위험에 처하자 "사람들이 약간 겁을 먹었다"면서 발을 뺐다. 그러니 정작 겁을 먹은 건 트럼프와 그의 최측근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호관세를 부과한 국가들에 절대, 절대 보복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의기양양했지만 트럼프에게 보복의 칼날을 휘두른 것은 정작 금융시장이었다.
상호관세 유예 결정 뒤 트럼프가 꺼내든 "난 국채 시장을 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좀 불안해하더라"라는 말이 눈에 띈다. 그도 그럴 것이 글로벌 국채시장에서 미국의 10년물과 30년물 등 장기물 국채금리가 날아갈 듯이 뛰면서 시장의 공포를 가중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의 상호관세 발표 이후 아시아 장에서 미 국채 10년물과 30년물 각각 4.51%와 5.02%까지 치솟았다. 30년물의 경우 최근 3거래일 동안 무려 50bp나 뛰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미 국채 가격이 소위 '똥값'을 향해 뚝뚝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미 국채 투매도 동반됐다. 물론 이를 두고 헤지펀드의 '베이시스 트레이드' 청산 영향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미국의 신뢰 상실에 대한 채권시장의 강력한 보복 조치라고 본다. 여기서 트럼프는 강한 현타(현실 타격)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10년물과 30년물의 대규모 입찰을 앞두고 있었던 점 또한 묘하다.
미국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달러와 군사력이다. 미국의 신뢰를 담보하는 최대 무기는 미 국채다. 그런데 글로벌 투자자들이 미 국채를 믿지 못하겠다고 나자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돌려 말하면 트럼프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막무가내, 우왕좌왕, 좌충우돌식의 관세 정책을 최대 경제정책으로 내세우는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사들일 유인이 떨어졌다고 보는 셈이다. 시장은 안전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상품에 투자하고 싶어 한다. 기꺼이 지갑을 열어 자금을 투입한다. 미 국채에 전 세계 투자자들이 몰려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트럼프는 거만했다. 상호관세 유예 조치로 국채 시장은 다소 안정세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트럼프에 대한 의구심을 거두진 않고 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으니 대비는 하고 있을 것이다.
시계를 돌려 2022년 영국으로 가보자. '골수 신자유주의자'였던 리즈 트러스 당시 영국 총리는 갑자기 대규모 감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재정 악화 우려로 촉발된 채권시장 붕괴의 공포가 영국 시티 오브 런던(런던 금융중심지)을 휩쓸었다. 영국 국채 가격은 폭락했고 곧이어 유럽 주변국, 미국, 아시아 채권시장까지 가격 폭락의 도미노는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미 재무장관을 지냈던 래리 서머스가 "영국 역사상 가장 창피한 일로 기록될 것"이라고 일갈했을까.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현실화해 영국 경제를 추락시키면서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전임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트러스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결국 트러스는 44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영국 최단기 재임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고서. '영국사태'는 정치의 무지·무능력함이 순식간에 금융시장을 어떻게 나락으로 보내는지 고스란히 보여줬다.
물론 트럼프가 트러스처럼 물러날 가능성은 '제로'라고 본다. 하지만, 전 세계 무역 질서와 금융시장의 안정화를 해치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두고 앞으로도 계속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일단 90일의 유예 기간을 설정하며 휴지기에 들어갔지만, 또 어떤 돌출 변수들을 꺼내 들지 안심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금융시장은 출렁일 것 같다. 그런데도 비관하지 않은 것은 '채권시장의 보복'을 경험한 트럼프가 섣불리 좌충우돌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막대한 재정적자에도 미국은 끊임없이 국채를 찍어내야 한다. 트럼프는 자신의 포퓰리즘 정책을 일관되게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엄청나게 찍어낸 국채의 이자도 갚아야 한다. 자신의 관세 정책으로 미국이 디폴트 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안 그러면 쫓겨날 테니. 결국 지난한 시간 싸움이다. 전 세계에서 미국에 보복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곳은 중국과 유럽연합(EU)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시장은 언제든 보복할 준비가 돼 있다. 그것을 버텨낼 수 있을까.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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