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지금] 트럼프가 파월 해임으로 보는 큰 그림
(뉴욕=연합인포맥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향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협박'이 또 나왔다. 파월이 기준금리 인하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자 트럼프는 지난주 "나는 파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가 그를 내쫓고 싶다면 파월은 곧바로 떠날 것이다. 정말이다"라고 공격했다.
파월을 향한 트럼프의 비판과 해임 압박은 하루 이틀된 소재가 아니다. 트럼프 집권 1기 때부터 잊혀질 만하면 나오는 단골 소재였고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었다. 트럼프가 당선돼도 파월을 해임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이자 트럼프 캠프에선 차기 연준 의장을 미리 '그림자 연준 의장'으로 임명해 파월의 힘을 빼는 전략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월가에서는 트럼프가 파월을 해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탱글우드토털웰스매먼트의 톰 브루스 매크로 투자 전략가는 "트럼프는 파월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연준을) 반복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라며 "(파월) 의장의 해임을 시도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클레이즈의 로한 카나 유로 금리 전략 책임자도 "놀랍지도 않다"며 "분명히 트럼프는 연준이 금리를 인하하기를 원하지만 (트럼프의 발언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적으로도 파월의 해임은 어려울 것이라는 해석이 현재로선 우세하다.
미국 연방준비법 제10조(Section 10)는 "정당한 사유(for cause)"가 있을 경우에만 대통령이 연준 이사들을 해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정당한 사유'는 일반적으로 법률 위반, 직무 태만, 부정행위 등을 의미하며 정책적 견해 차이는 해당되지 않는다. 파월은 연준 의장인 동시에 이사직을 맡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더 큰 그림의 판례 변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파월 해임도 그런 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는 앞서 연방거래위원회(FTC)와 전미노동관계위원회(NLRB) 등 행정부 산하 독립기관의 위원들을 해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지난 3월 미국 한 연방 판사는 '험프리 집행관' 판례를 인용하며 트럼프가 이들을 합법적으로 해임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험프리 집행관 대 미국' 판례는 1935년에 나온 미국 대법원 판결이다. 이 판례는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방 무역위원을 해임한 것을 두고 대통령은 직무 태만이나 직무상 위법행위에 대해 통지 및 심리를 거쳐 행정부 산하 독립기관의 위원을 해임할 수 있으나 다른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해임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후 험프리 집행관 판례는 미국 행정부의 독립기관 위원 해임에 빠짐없이 등장한 근간이 됐다. 파월 해임 가능성이 작다고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방준비법과 함께 험프리 집행관 판례를 핵심 근거로 들고 있다.
미국 좌파 성향 싱크탱크 '진보를 위한 미국 센터'의 헤일리 두루도간 선임 정책분석가는 "이 판례는 매우 기초적인 대법원 판례"라며 "많은 독립기관 제도의 뼈대를 형성해왔다"고 포천지에 말했다.
문제는 이 판례를 뒤집거나 적어도 힘을 약화하기 위해 미국 보수 진영에서 수십 년 동안 노력해왔다는 점이다.
포천지에 따르면 미국 보수 진영은 '단일 행정부론'을 내세우며 대통령이 독립 기관을 포함해 행정부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은 연준 또한 이같은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연준 의장 또한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해임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우파 진영의 운동은 서서히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20년 대법원은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사건에서 위원회가 아닌 단일 수장 체제인 독립 기관의 경우 대통령이 기관 수장을 해임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는 험프리 집행관 판례의 적용 범위가 좁아졌다는 의미다.
미국 우파 진영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우파 성향 '퍼시픽 리걸 파운데이션'의 올리버 던포드 선임 변호사는 대법원에 험프리 집행관 판례를 전면 재검토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그는 "FTC 같은 기관의 권한은 처음 판례가 내려졌을 때보다 훨씬 확대돼 사실상 행정 집행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며 "트럼프가 약간 변수는 될 수 있으나 대법원의 흐름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하는 뉴욕대 법학과 노아 로젠블럼 교수는 험프리 집행관 판례가 "미국 정부 운영의 근본적 일부"라며 "우리는 지금 역사상 대부분 부정됐던 정치 이론을 법원에 도입하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대학교 법학과의 조엘 알리시아 교수는 트럼프가 독립기관 수장을 잇달아 해임하는 것에 대해 "수십 년 전부터 보수 법률 운동 진영이 주장해온 대통령의 광범위한 해임 권한과 일치한다"며 "트럼프는 이 법적 문제를 실제로 실험하려는 유일한 인물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는 향후 4년 동안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설사 법적 다툼 속에 파월이 결국 임기를 다 마쳐도 대통령의 해임 범위 판례를 남기기 위해 트럼프는 파월 해임을 시도할 수 있다. 판례 위주인 미국은 대통령 선출만큼 대법원에 같은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하고 판례를 남기는 것에 엄청난 의미를 둔다.
다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험프리 집행관 판례의 적용 범위가 축소되는 흐름이더라도 연준은 여전히 특수한 지위가 인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데이비드 웨셀 경제연구 수석 연구원은 "새뮤얼 알리토 미국 연방 대법관은 CFPB의 자금 조달 관련 판결에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독특한 기관이고 역사에 의해 승인된 특별한 체제라고 묘사했다"며 "이는 연준의 독립성이나 지배구조가 도전받을 경우 알리토 대법관은 연준 측에 유리한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험프리 집행관 판례의 재검토를 대법원에 요청한 던포드조차 "연준은 예외로 취급돼야 한다"며 "솔직히 연준이 왜 다른지에 대해 통일된 이론은 없지만 연준은 뭔가 다른 존재라는 인식은 있다"고 포천지에 말했다.
그는 연준이 행사하는 권력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설령 대법원이 험프리 집행관 판례를 폐기하거나 뒤집더라도 연준 의장 해임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범위를 제한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포천지는 일부 법률학자들이 연준 독립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대법원이 험프리 집행관 판례를 유지해왔다고 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연방 대법원이 NLRB 사건을 통해 험프리 집행관 판례를 폐기하더라도 연준까지 확대 적용될지는 불투명하다"며 "이는 트럼프가 파월을 해임하는 데 법적 장애물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긴급 소송 등을 포함해 법적 다툼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로젠블럼은 "대법원은 여러 영역에서 대통령 권한을 확대해왔지만, 여전히 전통적 법치 가치와 미국 경제 불안정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봤다. (진정호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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