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삶
1910년 태어난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李箱)’은 그의 필명으로, 한자를 풀이하면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이다. 신명보통학교 동창인 화백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전해진다. 그 당시에는 화구상자를 오얏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구본웅은 야수파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국내 화단에 처음 소개하고, 우리나라 모더니즘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은 작가로 이상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대부분 이상을 독특한 세계관의 문학가로만 알고 있는데, 그의 이력은 생각보다 다채롭다. 삽화가이자 건축가였고, 직장 생활을 했으며, 다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실제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후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건축 기사로 근무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한 때가 이 시기다. 1930년 조선총독부 홍보 잡지 <조선>에 중편소설 <12월 12일>을 발표했고, 이듬해엔 <조선과 건축>에 ‘이상한가역반응’이란 시를 비롯 해 20여 편이 실렸다.
<조선과 건축>은 일본 건축가를 중심으로 결성한 조선건축회 학회지로, 당시 이상의 작품은 일본어로 실렸기에 국내 문단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1933년 폐결핵이 악화해 건축 기사 일을 그만둔 이상은 종로에 다방 ‘제비’를 열었다. 다방은 문인의 사랑방 역할도 했는데, 이때 이상은 박태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등 ‘구인회’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다양한 작품을 창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