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시인 쇼팽

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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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쇼팽'의 사진이다.

쇼팽과의 첫 만남은 기억나지 않지만, 알고 있는 피아노 연주곡 대부분은 그가 작곡한 것이다. ‘녹턴’, ‘에튀드’, ‘즉흥환상곡’, ‘이별의 곡’ 등 도입부 몇 음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연주곡이 수두룩하다. 지금도 각종 TV 프로그램과 광고 배경음악으로 사용될 만큼 쇼팽의 음악은 세기를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젤라조바볼라에 위치한 '쇼팽'의 생가 사진이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젤라조바볼라에 위치한 쇼팽의 생가.

폴란드가 낳은 천재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은 1810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50km 떨어진 작은 마을 젤라조바볼라(Żelazowa Wola)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인 그는 6세쯤 즉흥적으로 곡을 연주하고, 8세엔 폴로네즈 두 곡을 작곡할 정도였다. 쇼팽의 재능은 곧 바르샤바 귀족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대귀족 라지비우 공의 궁전, 러시아 대공 콘스탄틴의 궁전 등에서 연주하는 쇼팽을 보기 위해 많은 귀족이 모여들었다.

 

폴란드 언론은 쇼팽을 두고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천재가 태어났다”라며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1816년부터 쇼팽은 피아니스트 보이치에흐 아달베르트 지브니(Wojciech Adalbert Żywny)에게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훗날 쇼팽은 “지브니 선생님 앞이라면 누구나 천재가 된다”라며 겸손해했지만, 사실 그의 천재성은 스승 지브니의 지도력을 뛰어넘었다. 불과 2년 뒤 아달베르트 기로베츠(Adalbert Gyrowetz)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한 쇼팽을 본 지브니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이후로는 거의 지도를 하지 않았다고. 덕분에 쇼팽은 자유롭게 성장하며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었다.

조국을 사랑한 쇼팽

20세가 된 청년 쇼팽은 바르샤바를 넘어 크고 넓은 세계에서 재능을 펼치고 싶었다. 쇼팽이 선택한 도시는 오스트리아 빈이다. 19세에 졸업 여행으로 방문했을 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터라 빈으로 활동 거점을 옮기기로 다짐한 것.

 

그렇게 1830년 빈으로 향하던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러시아군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격히 흔들렸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이 애국”이라는 아버지의 편지와 주변 친구들의 만류에 결국 귀국을 포기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한편이었기에 빈에서의 삶은 실망과 외로움으로 가득했고, 결국 파리로 향하게 된다.

 

1831년 쇼팽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때 탄생한 연습곡 ‘혁명’은 쇼팽의 고통과 분노를 그대로 건반에 옮겨 만들어진 곡으로 알려졌다.

고국을 떠난 쇼팽은 여생을 외국에서 보내야 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안위를 걱정해 계속 파리에 머물 것을 당부했고, 결국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폴란드를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이 흙이 담긴 은잔을 선물했는데, 잔에는 “어디서든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고국을 그리워하고 걱정한 쇼팽은 그럴수록 음악에 매진했다.

쇼팽의 작곡 인생은 ‘폴로네즈(Polonaise)’로 시작해 ‘마주르카(Mazurka)’로 끝난다. ‘폴로네즈’와 ‘마주르카’는 폴란드 춤곡이자 폴란드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의 음악에서 고국 폴란드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쇼팽은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음악에 담아 표현했다.

 

이것은 어쩌면 자신만의 고국을 위한 독립운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슈만은 그의 음악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쇼팽의 마주르카 멜로디에 얼마나 위험한 발톱이 위협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러시아는) 분명히 그 음악을 금지했을 것이다. 쇼팽의 음악은 장미 속에 숨겨진 대포다.”

'쇼팽'이 작곡한 피아노 악보이다.

주황색 장미가 올려진 '피아노'이다.

피아노의 또 다른 이름은 쇼팽

쇼팽의 작품 대부분은 피아노곡으로 알려졌다. 그가 작곡한 200여 곡 중 대다수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다양한 기교와 화려한 표현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건반을 밀고 당기는 리듬과 악센트, 과감한 조바꿈 등을 통해 피아노의 잠재력을 극대화했다. 여기에 섬세하고 서정적인 감성이 더해져 피아노 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세계 음악사에서 ‘쇼팽’이라는 이름은 곧 피아노 음악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쇼팽은 폴란드 최고의 위인이자 자부심이다. 폴란드로 향하는 관문인 바르샤바 공항 이름도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다. 그를 기념하려고 1927년 시작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피아노 분야 세계 최고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단일 음악 콩쿠르다. 2015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우리나라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해 주목받았다.

39년이라는 짧은 삶 속에서 피아노 음악의 꽃을 피운 쇼팽. 그의 음악은 폴란드와 파리를 넘어 낭만주의 음악의 상징이자 세계 음악사의 위대한 걸작으로 남았다. 쇼팽의 삶과 사랑이 깃든 선율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 콘텐츠의 원문은 GOLD&WISE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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