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문정현 기자 = 수장의 결단력과 맹렬하게 일하는 조직력으로 일본 전자산업을 곤경에 빠뜨리며 전자산업의 거인으로 우뚝 섰던 삼성전자가 최근 애플과 TSMC에 뒤처지며 선대의 성공신화가 흐려지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5일 보도했다.
선대 회장이 키운 사업의 수익은 줄고 있으며 사업 쇄신은 좀처럼 진행되지 않고 있다며, 이와 같은 정체는 한국 경제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고 신문은 전했다.
"그 개선안에 전례가 있는가. 없다면 고(Go) 사인을(결재를) 할 수 없다."
삼성에서 일하는 한 30대 연구개발직 사원은 지난 가을 직속 상사에게서 들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직원은 제조공정에서의 수율 개선 아이디어를 내면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도전하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임원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는 "삼성에서는 최고의 보수가 보장되지만, 최근 수년간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됐다"고 토로했다.
삼성의 상무 이상 임원의 임기는 1년이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지 않으면 재계약은 이뤄지지 않는다. 출세 경쟁 속에서 임원들은 단기 성과를 요구하고, 이 때문에 현장 기술자들이 진득이 연구개발에 매진하는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삼성도 '대기업병'을 앓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삼성에 체념해 경쟁사인 SK하이닉스로 전직하는 기술자도 있다. 엘리트가 모여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삼성과 달리 SK하이닉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삼성과 싸울 수 없다"는 분위기다.
이와 같은 SK하이닉스의 기업문화가 꽃을 피운 게 고대역폭메모리(HBM)라고 불리는 차세대 D램이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반도체다.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분야에서 독주하고 있는 미국 엔비디아와 관계를 심화해 HBM에서 삼성전자에 앞섰다.
D램은 삼성이 도시바를 추월한 1992년 이후 30년 넘게 세계 1위를 지켜온 돈방석 사업이다. 첨단제품에서 한 번도 경쟁사의 추월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AI 붐을 잘못 읽은 삼성 내부에서도 동요가 크게 일었다. 작년 3분기 SK에 추격당했던 삼성은 반전을 위한 특단의 조치로 재고를 털어내 점유율을 회복했지만 과거 '메모리의 왕자'의 여유는 사라졌다.
경쟁력 저하는 메모리 반도체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스마트폰 분야에서 10년 이상 유지해왔던 세계 선두 자리(출하대수 기준)를 작년 애플에 내줬다. 스마트폰 출하 침체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다른 부문의 판매 감소로 이어진다.
'2030년 세계 선두' 목표를 내건 수탁생산 등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TSMC와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 지원에 발맞춰 미국 인텔도 수탁생산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알려져 2위인 삼성은 쫓기는 입장이 됐다.
가전과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중국 경쟁업체가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삼성의 주력 4개 사업의 수익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는 삼성이 한때 '일본으로부터 배우자'는 경영전략을 축으로 TV와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전화 사업에서 일본 기업을 제치고 세계 톱 기업으로 올라섰지만 이후 본보기가 될 만한 기업을 잃었다고 분석했다.
선대 이건희 회장이 이끌었던 사업은 사업쇄신을 반복해 성장세를 이어갔다. 지난 2010년에는 "향후 10년 뒤 현재 사업은 모두 시장에서 사라진다"고 호소하며 사내에 위기의식을 심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키운 4개 사업 체제는 아직 유효하지만 사업구성의 변화가 부족하다고 니혼게이자이는 지적했다. 2014년 고 이건희 회장이 병으로 쓰러진 후 10년간 삼성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옆걸음질 쳤다.
삼성을 오랫동안 분석해 온 유진투자증권의 이승우 리서치센터장은 "삼성은 투자경쟁이라는 치킨게임에서 계속 이겨왔다"며 "하지만 지금은 경쟁의 룰이 바뀌었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경영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해당 보도에 대한 전문가들의 다양한 반응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 국립정보학연구소의 한 교수는 현장 기술자들이 연구개발에 도전하는 분위기가 약하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삼성의 과제는 사업이 하드웨어에 치중돼 있는 데다 초미세 반도체에서 TSMC에 뒤처져 미국 IT 대기업들이 TSMC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최신 반도체가 활용되는 첨단 서비스나 소프트웨어의 동향을 사전에 읽어내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고베대학의 한 교수는 "삼성이라는 하나의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화되고 풍요로워진 한국 사회가 진행 방향을 잃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도 말했다.
도쿄대의 한 교수는 "조직이 커지면 잃을 것이 많아지고 필연적으로 보수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며 "이를 타파하는 경영자가 나오면 좋겠지만 창업자의 다음 세대가 되면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이길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삼성이 이대로 썩어갈 것 같지도 않다"며 "어딘가에서 승부처를 찾으면 그곳에 집중투자해 활로를 찾는 회사로 거듭날 수 있다. 앞으로의 대응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jhmoon@yna.co.kr
문정현
jhm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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