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삼성그룹 이건희 선대회장이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한 1993년 이후 대한민국은 사실상 반도체의 나라가 됐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로 처음 올라선 것도 이때다. 삼성전자가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고서 10여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이후 삼성전자는 30년 넘게 메모리 1위 자리를 거의 놓쳐본 적이 없다.
2011년 SK그룹을 새 주인으로 맞은 하이닉스가 세계 2위 메모리 기업으로 부상하면서는 한국 경제와 반도체 업황의 사이클이 더욱 공고해졌다. 반도체 업황이 살면 한국 경제가 사는 것이고, 반도체가 죽으면 그야말로 답이 없는 구도가 됐다. 지난달 기준 우리나라 수출에서 차지하는 반도체 수출 비중은 20%를 웃돈다. 경제·산업 전문가들이 줄기차게 외쳤던 산업 구조개혁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2년여간 우리를 힘들게 했던 경제 슬럼은 반도체 침체와 직접 맞닿아있다.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1일 오후 부산항이 분주한 모습이다. 한국의 3월 수출이 작년보다 3.1% 증가하면서 6개월 연속 '수출 플러스'를 기록했다. 반도체 수출은 117억달러로 2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컴퓨터 등 4대 정보기술(IT) 분야 품목의 수출 증가율도 모두 동시에 플러스를 나타냈다. 2024.4.1 handbrother@yna.co.kr
반도체의 봄날은 올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다. 사실 올해 반도체 업황 전망은 장밋빛에 가깝다. 지난해 세계 반도체 매출은 전년과 비교해 9% 넘게 감소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올해 매출 전망치는 두 자릿수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는 특히 메모리 반도체의 고성장을 예상한다. 고수익 제품의 호조 덕분에 메모리 매출이 40% 넘게 급증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았다. 메모리 최강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고무적인 일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에만 작년 연간 실적을 넘어서는 영업이익을 냈다. 1분기 영업이익 잠정치는 6조6천억원으로, 시장 전망치를 1조원 넘게 웃돌기도 했다. 1분기 매출은 71조원으로 5분기 만에 70조원대를 넘어섰다. 잠정 실적이라 부문별 세부적인 숫자가 공개되지 않았지만, 증권가에선 반도체(DS) 부문에서만 2조원 가까이 흑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한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삼성전자의 1분기 반도체 실적에 대한 시장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D램 회복세는 뚜렷했지만, 메모리 업계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낸드플래시에 대해선 신중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낸드플래시 가격이 1분기에 D램 이상으로 급등한 데다, 저장장치 SSD 판매가 크게 늘면서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부문 역시 흑자 전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적 개선 지속성이 중요할 텐데, 이 전망도 나쁘지 않다. 증권가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질주가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삼성전자는 당장 올해에 30조원 넘는 영업이익을 내고, 내년에는 역대 최고치인 50조원 수준까지 회복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의 실적 호조는 기댈 곳 없는 한국 경제에 한 줄기 빛 같은 존재다. 지난 3월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 급증한 117억달러로 집계됐다. 2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실적이다. 반도체 수출 호조에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은 전년과 비교해 3.1% 늘어났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6%였다. 2년여 만에가장 높은 수치다. 반도체 비중이 과도하다는 게 부담이긴 하지만, 당장은 반도체 수출 전망이 밝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무역협회가 집계하는 2분기 수출산업경기전망지수는 116.0으로 12분기 만에 가장 높았고, 반도체(148.2)는 27분기 만에 최고치를 보였다.
반도체의 봄은 조금 더 길어질 전망이다. 인공지능(AI)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덕분이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의 진화로 메모리 기술은 더 중요해지고 고부가 제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작년부터 진행된 메모리 반도체 감산은 최근 과잉재고 해소로 연결되고 있다. 재고는 빠르게 줄어들고 수요는 급증하는 추세를 고려하면 반도체 호황 사이클은 상당기간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호황이 온다고 모두가 과실을 따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미국발 반도체 '쩐의 전쟁'이 가속화하면서 글로벌 업체 간의 치킨전쟁은 이제 시작이란 평가가 많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TSMC가 미국 정부에서 최대 66억달러(약 8조원)의 반도체 생산지원금을 받기로 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정부가 인텔에 최대 85억달러의 직접보조금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외신에 따르면 조만간 삼성전자에도 60억달러 규모의 보조금 지급 발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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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와 삼성전자, 인텔 등 글로벌 파운드리 기업들은 미국 내에 최첨단 공정을 가동해 정면 승부를 펼치게 될 것이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방향이 우리 기업 입장에서 매우 불편함에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건 비단 보조금 문제만은 아니다. 엔비디아와 AMD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미국 기업들이 절대적인 패권을 가지게 되면서 파운드리와 메모리 기업 모두 이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도가 만들어진 탓이다.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가속도가 붙고 있는 지금, 이 싸움에서 밀리면 끝이란 위기의식이 팽배해진 분위기다. 반도체 호황은 반도체의 나라에 호기로운 일이다. 하지만 출혈 경쟁이 과도해지면 그 싸움에서 이겨도 나눠 먹을 수 있는 과실은 턱없이 부족할 수도 있다. 글로벌 경쟁 구도에서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외교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건 기본이다. (취재보도본부 기업금융부장)
chhan@yna.co.kr
한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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