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정선영 특파원 = 달러-엔 환율이 34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으면서 외환시장의 시선이 일본에 집중되고 있다.
달러-엔 환율은 장중 158.43엔까지 가파르게 올랐다. 올해 달러-엔 환율은 지난 1월 저점인 140.68엔에서 158엔대까지 넉 달 만에 무려 12% 이상 급등했다.
일본 엔화 지폐와 미국 달러화 지폐 [촬영 이세원]
지난해 1년 동안 달러-엔 환율이 1월 127.22엔 저점에서 11월 고점 151.94엔까지 19%대 상승한 것과 비교하면 불과 넉 달 동안의 상승 속도는 매우 가파르다.
일본 외환당국은 구두개입에 나서면서도 본격적인 실개입은 자제하고 있다.
이는 달러-엔 환율이 기본적으로 미국과 일본 간의 통화정책 격차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34년 만의 최고치인 달러-엔 환율은 1차로는 높은 미국의 금리(5.25~5.50%)와 이제 막 마이너스를 벗어난 0%대 일본의 금리 차이를 의미한다.
일본 외환당국이 달러-엔 환율을 별다른 제지 없이 보고 있는 것은 결코 무력해서가 아니다.
일본 당국은 외환시장에서 한 번 개입에 나서면 무섭기로 유명하다.
외환시장에서 대표적인 개입 사례는 '일은포 사건'이다. 일은포는 일본은행의 대포라는 의미다.
2003년 초반 일본 외환당국과 글로벌 헤지 펀드가 대결한 경우였다.
헤지펀드들이 엔화 강세에 베팅하며 달러-엔 환율을 끌어내리자 일본은행은 개입에 나섰다. 당시 10분 단위로 10억엔씩, 시간당 600억엔 규모로 마치 대포처럼 개입 물량이 들어왔다고 한다. 일본 외환당국의 개입은 무려 15개월 동안 35조엔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엔화에 베팅했던 수많은 헤지펀드들이 파산하고 백기를 들고 나서야 개입은 멈췄다.
지금은 그때의 상황과 확연히 다르다.
당시의 개입은 엔화 강세 저지를 위한 엔화 매도, 달러 매수 개입이었다. 엔화 자금을 확보해 달러를 매수하므로 일본 당국에 유리했다.
지금은 반대다. 달러-엔 환율 상승을 막으려면 달러 매도 개입을 해야 한다. 즉, 보유한 달러를 팔아야 한다.
달러 매도 개입은 자금력이 막강한 일본 당국이라 해도 신중하게 결정될 공산이 크다.
일본은 현재 세계 1위 미 국채 보유국이다. 재무부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1월에 일본의 민간 및 공공 투자자들은 전월보다 150억달러 증가한 1조1천530억달러의 미 국채를 보유했다. 엔화로 치면 약 182조엔이 넘는 자금을 보유한 셈이다.
따라서 일본 당국은 가장 효과적인 달러 매도 타이밍을 찾아야 한다.
시장의 투기적 포지션이 최고조에 달하고, 펀더멘털 요인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 시점이야 말로 개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때다.
투기적 포지션은 차츰 강해지고 있다. 일본 당국이 실개입을 자제하면서 지난주부터 달러-엔 환율에는 본격적으로 투기성으로 보이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달러-엔 환율은 155엔대를 웃돈 후 조심스럽게 차례로 저항선을 테스트해왔다. 지난 26일에는 장중 154엔대에서 158엔대까지 순식간에 급등했다.
일본은행의 실개입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세력이 달러 매수, 엔화 매도에 나선 셈이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엔화 약세가 장기화될 수 있다고 언급한 점도 투기적 움직임을 부채질했다.
문제는 일본은행의 달러 매도 개입에 힘을 실어줄 만한 펀더멘털 요인이강하지 않다는 점이다.
달러 매도를 뒷받침할 변수라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인하를 시사하거나, 지정학적 위험이 강해져 엔화 매수가 힘을 받는 경우를 꼽을 수 있다.
연준은 오는 4월 30~5월 1일에 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를 연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이 올해 금리인하 가능성을 고수한다면 일부 시장의 금리인하 기대가 나타날 수도 있다.
안전자산 선호를 부추길 지정학적 위험은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면전 우려가 완화되면서 일단락됐다.
연합인포맥스
그렇다면 달러-엔 환율 흐름이 바뀔 가능성은 아예 없을까.
달러를 보유한 미국 투자자 입장에서 일본 자산은 꽤 매력적이다. 지난해에 이어 2024년의 뉴욕의 투자자들은 일본 시장에 투자하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올해에도 연달아 일본 마켓에 투자하는 법을 소개하며,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되살아날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다.
라자드 자산운용은 4월 보고서에서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라자드 운용은 2024년에 중장기 일본 주식에 대한 긍정적 전망과 함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인플레이션으로의 전환 등을 예상했다.
모닝스타도 지난 3월에 엔화 약세는 일본의 수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엔화가 약세를 보이면 로봇공학, 자동차, 컴퓨터 게임 등의 수출 가격이 더 낮아져 수출 경쟁력이 세진다.
엔화가 회복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차입 비용이 0.0~0.1%인 반면 영국은 5.25%, 유로존은 4.5%에 달하기 때문이라고 모닝스타는 짚었다.
그럼에도 해외투자자들이 일본에 대해 장기적으로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은 인플레이션 회복으로 지출이 늘어나고, 자본 재투자가 촉진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모닝스타는 내다봤다.
최근까지 뉴욕금융시장에서는 저금리 엔화를 빌려 미국에 투자하는 엔캐리트레이드 자금이 강력한 힘을 보여왔다.
지난해 12월 닛폰 스틸이 US 스틸을 인수했고, 지난 1월 일본 주문 주택건설 1위 업체인 세키스이하우스가 미국의 건설업체인 MDC홀딩스를 인수했다.
일본 기업들은 저금리로 자금을 수십억 달러 조달해 해외 기업을 인수하고, 덩치를 키우고 있다.
뉴욕 금융시장 투자업계에서는 일본계 은행들의 자금 조달을 따라갈 자가 없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마이너스 금리를 벗어났다고 하지만 제로 금리의 조달 파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뉴욕의 한 금융기관 관계자는 "수익률이 7% 정도인 딜의 경우 다른 나라 은행들은 쉽게 들어갈 수 없지만 일본계 은행들은 공격적으로 들어간다"며 "마이너스 금리로 조달이 가능해 출발선이 이미 다르다"고 말했다.
앞으로 엔화가 강세를 보인다는 기대가 커진다면 금융시장 흐름이 달라질 수도 있다.
아직은 기대가 약하다. 일본 주식시장만 보더라도 아직은 미국 투자자들이 큰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
이달 초 닛케이아시아 보도에 따르면 도쿄증권거래소 '투자 부문별 매매 동향' 데이터에서 2023년 회계연도에 일본 주식으로 유입된 외화 투자 규모는 7조6천900억엔(507억달러)으로 2013년 9조5천억엔 이후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주로 유럽 투자자들이 2023년 4월부터 올해 1월까지 펀드 보유를 포함해 일본 주식에서 8조7천억엔 순매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이 월 8천231억엔 어치의 일본 주식을 순매수해 제일 많았다. 이는 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투자청 등의 국부펀드 자금인 오일머니였다고 닛케이는 분석했다.
이와 달리 일본 주식에 투자한 미국 투자자의 순매수는 월평균 650억엔으로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달러-엔 환율 160엔대를 앞두고 큰 흐름이 바뀌려면 일본 경제에 대한 투자 전망과 자금 흐름이 탄력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일본의 인플레이션은 아직 탄력을 받지 않은 상태고, 일본은행은 정부 부채 이자 부담과 엔화 약세에 따른 수출 기업 지원 효과 등 금리 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달러 자금을 보유한 투자자들은 '엔화 강세'를 유발할 만한 신호를 기다리고 있지만 일본의 속사정은 실타래처럼 꼬여있다.
일본과 미국의 통화정책 격차만큼 달러화와 엔화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정선영 뉴욕 특파원)
syjung@yna.co.kr
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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