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월가에 '60대 퇴진 룰' 같은 건 없다. 투자의 세계에서 꼭 필요한 경험은 필수적으로 오랜 세월을 동반해야 하고. 이런 풍부한 경험을 지닌 '구루(guru)'들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2005년부터 19년간 JP모건체이스를 이끌어온 제이미 다이먼 회장 겸 CEO(68)도 그중 한 명이다. JP모건의 얼굴이자, 월가의 대통령, 월가의 황제다.
남은 임기 질문에 그는 항상 '5년'이라고 농담조로 답해왔다. "내 발언은 그대로다. 5년 남았다". 몇 번이나 그 5년이 지나도 다이먼은 여전히 최고 자리에 있었다.
단골 질문에 지난주 대답은 달랐다. "이제 5년은 아니다"
이는 조기 은퇴를 시사한 것으로 읽혔고, 당일 뉴욕증시에서 JP모건 주가는 4.5% 급락 마감했다. 우리 돈으로 약 40조원의 시가총액이 하루 만에 날아간 것이다. '다이먼 없는 JP모건'에 대한 시장의 평가다.
다이먼이 이끄는 JP모건은 미국 최대 은행이다. 처음부터 최대는 아니었다.
다이먼의 월스트리트 인생은 원래 '월가의 금융황제'라는 타이틀을 가진 샌포드 웨일 씨티그룹 공동회장 겸 CEO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다이먼의 아버지는 웨일이 초창기에 세운 증권사에서 스타급 중개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26세 청년 다이먼은 진로를 의논하러 아버지 직장 상사였던 웨일을 찾아갔고, 곧바로 웨일의 개인비서로 채용된다. 훤칠한 키, 번듯한 외모, 유창한 달변이 웨일을 금세 사로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이먼은 웨일을 모시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월스트리트 인맥을 넓혀갔고 인수합병(M&A)과 구조조정 노하우를 배웠다.
웨일이 파워게임에서 밀려나 사장직을 빼앗겼을 때도, 야인생활을 하다 맨해튼 외곽에 작은 금융컨설팅 회사를 차릴 때도 다이먼은 함께 했다. 월가 역사상 의미 있는 합병이라 불리는 트래블러스 그룹과 씨티코프 합병 때도 웨일의 최측근으로 작업을 주도했다. 두 회사의 합병으로 만들어진 씨티그룹에서 황태자 수업을 받고 있던 때가 다이먼의 나이 42세였다.
조기 승진을 거듭했던 다이먼은 웨일에게는 '양날의 칼' 같은 것이었다. 이미 자신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췄고, 언젠가 자신에게 도전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웨일에게는 있었다. 웨일이 직접 다이먼에게 해고 통보를 하면서 스승은 제자를 버렸고, 다이먼은 1998년 씨티그룹을 떠났다. 사임이 발표된 후 일주일 내내 씨티그룹 주가는 떨어졌다.
복수를 준비하며 18개월 동안 두문불출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다이먼은 뱅크원 CEO 자리를 수락했다. 뱅크원은 지방은행으로 출발했지만, 합병을 거듭하면서 중서부 지역 최대 은행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다만 전 회장의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성장 동력을 찾아야 했다. 다이먼이 뱅크원 CEO로 간다는 소식만으로도 뱅크원 주가는 크게 올랐다.
다이먼은 순손실 기업을 3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꿔놓는 등 뱅크원의 체질 개선을 이뤄냈다. 자연스레 재임 기간 뱅크원 주가는 급등했다. 다이먼은 월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영인 중 한명으로 우뚝 섰다.
스승에게서 배운 노하우를 이용해 다이먼은 2003년 1월 JP모건체이스에 합병을 제안했다. 때마침 경쟁사인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다른 금융회사 인수에 나서는 등 몸집 불리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2004년 1월 JP모건체이스와 뱅크원은 합병을 공식 발표했는데, 2위 은행인 JP모건체이스가 5위 은행인 뱅크원을 인수해 씨티그룹을 맹추격하게 된 것이다.
씨티그룹,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미국 상업은행 3강 체제 속에서 다이먼은 흡수되는 은행의 CEO가 합병 은행의 CEO가 되는 첫 사례가 됐다. 오랜만에 월가로 돌아온 탕아가 스승 웨일을 향해 어떻게 복수의 칼날을 세울지 관심이 집중됐다.
결국은 다이먼의 승리였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베어스턴스, 워싱턴뮤추얼 등 부실 은행을 헐값에 인수하는 공격적인 베팅으로 다이먼은 JP모건을 세계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때 붙은 수식어가 '금융위기 최후의 승자'였다. 지난해에는 지방은행의 도미노 위기 속에서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을 사들였고, 드디어 지난해 12월 JP모건의 시가총액은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씨티은행을 합친 시가총액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씨티은행은 이제 JP모건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지금의 JP모건은 다이먼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이먼이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제도적 장치 덕이기도 하다.
JP모건과 다이먼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나라 CEO 임기에 대한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재연임, 장기 집권을 금기시하는 우리나라 금융풍토에서 다이먼과 같은 백전노장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셀프 연임'으로 비유되며 불특정 다수의 비난과 비판을 받아야 해서다.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의 깊이를 대접해 줄 순 없는 일일까.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기업 CEO의 평균 재임 기간은 10년이 넘는다. 증권사, 보험사, 은행의 CEO들에게 사회적 견제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그들의 성과와 성취에 대한 인정이다. (투자금융부장)
sykwak@yna.co.kr
곽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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