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철학·메시지의 부재
(서울=연합인포맥스) 유수진 기자 = "우리는 이재용 회장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 회장에게 결정 권한이 있다면 서초사옥이 아니라 (이 회장 자택이 있는) 이태원에서 행사를 했을 것이다."
삼성전자[005930]의 사내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의 이현국 부위원장은 지난 5월 집회에서 "이재용 회장은 바지회장"이라며 이같이 발언했다. 그러면서 삼성의 '실세'로 정현호 사업지원TF장(부회장)을 지목했다. "지금 삼성의 모든 결정 권한은 정 부회장에게 있다"면서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삼성의 '2인자'로 평가받는 정 부회장이 그룹 내부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는 건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얘기다. 이 회장이 법원을 드나드는 기간이 길어지며 삼성전자를 비롯해, 그룹 사업 전반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사업지원TF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커졌다고 한다. 노조가 교섭 상대로 정 부회장을 거론하기에 이른 배경이다.
무엇보다 삼성이 뼈아픈 부분은 노조 주장이 이 회장의 조직 장악력과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점이다. '삼성 오너 3세'인 이 회장은 선대 회장들과 달리 아직 회사의 미래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10년 차 총수지만…선명하지 않은 '경영 철학'
26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올해로 삼성그룹을 이끌기 시작한 지 만 10년이 됐다. 회장 취임은 2022년 10월이지만, 이건희 선대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경영을 할 수 없었던 2014년 5월부터 사실상 총수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기간 이뤄낸 성과에 대해선 물음표가 따라붙는다는 게 중론이다. 오랫동안 사법 리스크에 발목 잡혀 삼성 총수로서 뚜렷한 경영 구상과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다. 삼성 안팎에서 '이재용 시대'를 두고 '잃어버린 10년'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실제로 이 회장은 1993년 이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비견할 만한 자신만의 경영 철학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2020년 5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며 '뉴 삼성'으로의 혁신을 선언했지만, 경영권 승계 논란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주축이 됐다. 삼성이 잇따라 대규모 투자와 고용 계획을 발표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지만 이를 관통하는 메시지, 나아가 미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이 회장은 2016년 10월 삼성전자 등기임원에 오르며 책임경영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이사회 활동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국정농단' 사태로 수사를 받기 시작하며 동력이 꺾였다.
이후 뇌물 혐의가 인정돼 징역을 살았고, 가석방에 이어 복권까지 받았지만 사법 리스크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부당 합병·분식 회계' 의혹으로 4년째 재판을 받고 있다. 1심에서 무죄가 나와 한숨 돌리긴 했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른 상황이다. 당연히 정상적인 경영활동도 불가능하다.
◇'메시지' 대신 '침묵'
무엇보다 이 회장은 항상 침묵을 유지했다. 2022년 10월 회장 취임 때는 물론, 지난해 신경영 선언 30주년, 회장 취임 1주년 등 '기점' 때마다 재계의 관심이 그의 입에 집중됐지만 메시지는 없었다. 이건희 선대회장 별세 3주기 때나 '부당 합병'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 등도 마찬가지다.
오는 10월 취임 2주년을 앞두고 있지만 이번에도 재판에 집중하며 조용히 보낼 거란 전망이 우세하다. 무죄 입증을 가장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뚜렷한 메시지를 내기 어렵고, 사업적 드라이브를 걸기도 쉽지 않은 거란 해석이 나온다. 이 회장은 올 초 책임경영 차원에서 삼성전자 이사회 합류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성사되진 않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 하면 단번에 신경영이 떠오르지만 '이재용 회장'은 마땅히 떠오르는 키워드가 없다"고 꼬집었다. 사법적 이슈로 인한 물리적 공백에 메시지의 부재가 더해져 리더십 부족이란 이미지를 주고 있단 설명도 덧붙였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는 동안 삼성은 하루가 멀다 하고 위기론에 휩싸였다. 대외적 불확실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가운데 '세계 1등'을 자신했던 메모리 분야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줬고, 파운드리에선 좀처럼 반전의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모바일과 TV, 가전 중 어느 하나도 자신 있게 초격차를 말할 수 있는 사업이 없다는 자조가 내부에서 나온다.
신수종 사업 개척에 필수적인 대형 인수합병(M&A)도 2017년 하만 이후 7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지난해 11월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겠다며 야심 차게 출범한 미래사업기획단은 당초 부회장급 조직에서 6개월 만에 사장급 조직으로 격하됐다. 지난 5월 전영현 당시 단장(부회장)과 경계현 사장(당시 DS부문장)의 보직을 서로 맞바꾸는 원포인트 인사가 난 영향이다.
그 와중에 전삼노가 창사 이래 첫 총파업을 벌이며 조직 내 혼란이 가중됐다. 노사 갈등을 넘어 노노 갈등으로 확산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지금의 삼성엔 이들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 즉 리더십이 없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찬희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노사 문제는 삼성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며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좀 더 관심 있게 지켜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sjyoo@yna.co.kr
유수진
sjyoo@yna.co.kr
함께 보면 도움이 되는
뉴스를 추천해요
금융용어사전
금융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