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얼마 전 한국거래소 윗선의 호출을 받았다던 금융회사 임원의 한숨은 깊었다. 하루빨리 밸류업 정책에 참여하라는 조언, 부탁, 아니 무언의 압박을 듣고 복잡해졌다고 한다. 주주환원으로 주가가 올라가는 일을 마다할 경제 주체는 없다. 하지만 자사주 소각이 핵심인 지금의 밸류업 정책은 오너 기업엔 여전히 '섭섭한' 일이었다.
상반기 실적발표를 마친 은행권 금융지주들이 저마다 주주환원 계획을 발표했다. 모두가 외치는 숫자는 비슷했다. 너도나도 수년래 자기자본이익률(ROE) 10%· 보통주 자본비율(CET1) 13%·총 주주환원율 50%를 달성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곧바로 자사주 소각 소식도 이어졌다. 금융지주들은 올해만 조(兆) 단위 자사주 소각을 진행 중이다. 그 덕에 앞으로는 '실적 마사지'도 어려워졌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지나친 이익을 경계해온 그간의 관행은, 밸류업 정책 아래 잦아들게 됐다. 자사주를 소각하려면 더 열심히 벌어야만 한다. 설사 그것이 '이자 장사'라는 이름 아래 또다시 비난을 살 지라도 말이다.
은행 금융지주의 주주환원 바통은 보험·증권 기반의 비은행 금융지주에 넘겨질 가능성이 크다. 올해 7천억 달러의 수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정부의 방침과 더불어 녹록지 않은 내수경기를 볼 때, 제조업과 같은 기업보다 금융회사가 '만만'한 게 현실이다. 한국투자금융지주를 비롯해 삼성생명·한화생명·미래에셋생명·삼성화재·현대해상·DB손해보험·키움증권·대신증권·신영증권·부국증권과 같은 오너가 명확한 금융회사들이 최우선 타깃이다.
메리츠금융지주의 필두로 이들은 더욱 거센 압박에 놓이게 됐다. 메리츠화재와 같은 잘나가는 상장 자회사를 폐지하며 지주사 체제로 출범한 메리츠금융은 조정호 회장의 주주 평등원칙을 강조하며 일찌감치 밸류업 정책에 부합하는 주주환원을 발표했다. 연결 당기순이익의 50%를 주주에게 돌려주겠다며, 현재 주가의 밸류에이션에선 자사주 매입·소각에 집중하지만 예상 주가수익비율(PER)이 10배 이상이 될 경우 현금배당 비율을 높이리란 원칙도 내세웠다. 이는 명확한 기준 아래서만 자사주를 매입하는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와도 닮았다. 최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메리츠금융의 밸류업 계획에 A+라는 점수를 매겼다. 모든 상장사가 메리츠금융처럼 밸류에이션(PBR 1.7 배)을 끌어 올린다면 코스피가 4,200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도 했다. 은행 금융지주에는 주인이라도 없다지만, 메리츠금융은 그렇게 다른 오너 금융회사에 얄미운 선례가 됐다.
일반적인 오너 계열의 금융회사가 주주환원, 그중에서도 자사주 소각을 대하는 온도는 사뭇 다르다. '(오너에게) 보고조차 쉽지 않다'는 이들의 속내엔 경영권 방어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하다. 의결권도 없는, 배당도 받지 못하는 주식이지만 자사주는 '금고주(金庫株)'로 불릴 정도로 그만큼 존재 가치가 남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상법상 자사주 매입이 자율화된 건 2011년 일이다. 이때부터 기업은 자사주를 매입해 유통주식수를 줄여 주당순이익(EPS)을 높였다. 주주에게 돌아갈 몫이 늘어나니 주가수익비율(PER)도 개선돼 기업 가치도 커졌다. 임직원에게 주는 스톡옵션을 준비하거나, 경영 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시장에 표출하고자 자사주를 샀다. 경영권을 위협받을 땐 백기사에게 자사주를 넘겨 우호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른 기업과 자사주를 맞교환하면 의결권을 늘리는 효과도 가능했다. 최대주주 입장에선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회삿돈으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그래서 우리나라 주주들은 자사주 매입보단 소각에 방점을 찍는다. 자사주를 매입하더라도 스톡옵션이나 우호 세력에 지분을 넘기는 방식으로 시장에 주식이 풀리면 유통주식수가 늘어나 유상증자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다. 그래서 아예 발행주식수를 줄이는 '소각'이야말로 진짜 주주환원이라고 생각한다.
밸류업 정책과 맞물려 '어쩔 수 없이' 자사주 소각은 늘었다. 올해 상반기에만 100여개의 코스피·코스닥 상장사가 6조7천억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을 예고했다. 삼성물산, SK이노베이션, 현대차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도 이름을 올렸다.
오너 계열 금융회사들은 애가 탄다. 혹자는 기업의 재투자에 쓰일 돈이 밸류업 정책을 위한 주가 부양에 낭비되는 게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자본금이든 이익잉여금이든 자기자본이 줄어들면 부채비율도 높아져서다. 신사업 먹을거리도 없고, 쌓아야 할 충당금도 늘어가는 데 자사주마저 소각해야 하니 살림살이가 빠듯하다고 한다. '주주 자본주의의 배신'을 쓴 린 스타우트의 말처럼 주주가치 극대화는 실상 단기 성과에 집중한 허상이며, 기업의 성과를 갉아먹을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떤 기업이든 시장이 성숙하면 자체적인 성장동력은 떨어진다. 성장을 위한 투자가 줄면 자본은 쌓이고, 이는 재배치가 필요하다. 경영권 방어라는 논리 또한 철 지난 구태다. 동력을 잃은 기업은 자사주가 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한 사모펀드(PEF) 대표는 "성장하지 않는 기업의 죄다. 이제는 누가 자본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느냐의 싸움"이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성장"이라고 귀띔했다. (투자금융부 정지서 기자)
[강민지 제작] 일러스트
jsjeong@yna.co.kr
정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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