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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서의 조곤조곤] '쓸모없는' 두산밥캣 방지법

2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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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역사는 이해상충의 싸움이었다. 1992년 1월, 외국인에게 개방된 주식시장이 IMF와 카드채 사태를 거쳐 오늘날 밸류업을 외치기까지, 자본시장법은 유가증권시장의 매도자와 매수자 간 부딪히는 이해관계를 해결하고자 여러 차례 개정됐다. 그렇게 과거의 주주, 현재의 주주, 미래의 주주가 싸워왔다.

기업 밸류업(PG)

[강민지 제작] 일러스트

얼마 전 두산그룹은 일반 주주들에게 백기를 들었다. 정확히는 연일 자회사 합병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에게 든 백기였다. 물론 그마저도 백기를 드는 척만 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간 주식교환은 포기했지만, 두산밥캣을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두산로보틱스로 이전하는 안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소액 주주들은 여전히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재편을 완전히 저지하기 위한 표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두산은 똑똑했다. 혹자는 두산의 타이밍을 나무랐다. 금융당국 수장이 연일 해외 기업설명회(IR)에서 밸류업을 외치는데,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민낯을 보여주는 결정을 '그때' 했어야만 했냐며 그들의 정무적 감각을 탓했다. 하지만 두산의 타이밍은 '그때'여야 했다. 밸류업 정책의 하나인 상법 개정이 일반 주주의 편에 더 가까이 서기 전에, 수월한 주가 관리를 위해 공매도가 부활하기 전에 지배구조를 바꿔야만 했다. 자칫 주식매수 청구권이 장애물로 거론됐지만, 문제는 없었다. 공교롭게 얼마 뒤 체코에서 원전 수주 소식이 전해지며 또다시 주가를 뒷받침했다. 그저 두산의 고려 대상에 주주가 없었을 뿐이다.

두산 사태 이후 정치권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소액주주 보호를 골자로 한 자본시장 관련 법안을 쏟아냈다. 특히 저평가된 알짜기업과 고평가된 적자기업의 비상식적이었던 합병비율에 주목하며 '두산밥캣 방지법'도 복수로 발의됐다.

사실 합병비율을 둘러싼 논란은 자본시장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역사다. 2015년 삼성물산과 옛 제일모직을 시작으로 SK와 SK C&C, 동원과 동원엔터프라이즈 등 모두 대주주에게 유리한 합병비율로 일반 주주들의 원성을 샀다. 그래서 자본시장법상 주가와 자산가치를 활용해 규정돼있는 상장사와 비상장사의 합병비율 산정 방식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정치권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는 본질을 한참 벗어났다. 흔한 입법 과정이 그렇듯이 사태 대응에 급급해 잘못 나온 처방전이다. 합병비율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누가 기업의 가치를 산정하는가'에 있다. 회계법인과 신용평가사들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좋게 뽑아주면 그만이다. 그 숫자를 누가 어떤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활용하느냐가 문제다. 누구에게도 불리하지 않은 숫자를 써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주가만 가지고 산정되는 상장사의 가치가 옳다는 건 아니다. 주가는 특정 시점에 시장이 가진 호불호일 뿐,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를 대변하기엔 부족하다. 기업 펀더멘털과는 별개로 거시 환경과 수급에 따라 달라지는 변수일 뿐이다. 다만 현재의 산정 방식에서 더 큰 문제는 주가라는 숫자 자체보단, 대주주에게 유리한 주가의 타이밍을 누가 선택하느냐에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모·자회사가 합병할 때 대주주를 제외한 소액주주들이 합병 비율을 산정하고 의결한다. 어차피 주주 간 거래이니 이해관계자인 대주주의 목소리는 소액주주보다 작아야 한다는 게 인도네시아의 법이다. 'K-금융'을 수출하는 인도네시아에서조차 상식적인 일이, 금융 선진국을 외치는 우리나라에선 법제화가 필요한 꽤 어려운 일인 셈이다.

통상 지배주주가 명확한 기업에서 특수관계자 간 거래는 지배주주의 사익을 편취하는 수단이 되기 쉽다. 그 거래가 모든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리라는 건 지나친 낙관이다. 다시 말해, 대주주가 소액주주의 부를 희생하면서 자신들의 부를 추구할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특수관계자 거래에서 이해관계자의 의결권은 제한돼야 한다. 교과서 같다 치부할 수 있지만, 당연한 논리다.

그래서 영국은 금융감독청(FCA)이 상장 규정을 통해 특수관계자 거래에 관한 정보를 주주들에게 제공하고 이해관계자를 배제한 소액 주주의 승인을 얻도록 하고 있다. 최근에는 침체한 증시를 살리고자 런던거래소의 상장 시스템을 간소화하며 그간 강화했던 의결권에 유연성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기업의 중요한 결정에 대한 주주의 승인은 여전히 필요하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해상충을 초래하는 특수관계자의 거래에서 공정성 입증책임을 지배주주에게 직접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이사들은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면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는 게 일상이다. 기업 간 합병을 알리는 미국의 숱한 경제 기사 말미에는 로펌 광고가 수두룩하다. 이익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는 주주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손짓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에게까지 확대하겠다는 움직임이 거세다. 사실 주주총회를 통해 최종 선임되는 이사의 역할은 명확하다. 이는 이사가 주주를 대리해서 회사의 경영에 관여하는 사람이라는 방증이다. 이사가 눈치를 볼 사람은 최고경영자(CEO)도, 대주주도 아닌 모든 주주다.

경제단체들은 아우성친다. 22대 국회에 상정된 18건의 상법 개정안이 기업의 경영과 투자에 악영향을 준다며 반발한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의 이사 선임 시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전원 분리선출, 독립이사제와 권고적 주주제안제 도입 등이 20년 전 SK그룹을 공격했던 제2의 소버린을 등장시킬 수 있다며 우려한다.

지난 11일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상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주주의 이익도 보호하면서 기업의 경영에 불필요한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어쩌면 자본시장에서 합리적인 가격이란 처음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금융의 논리라면 누군가의 손해가 다른 이의 이득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 기업의 가치를 키우겠다는 취지에서 꺼낸 밸류업이, 그리고 우리나라의 자본시장이 더 발전하려면 그렇게 가야 한다. (투자금융부 정지서 기자)

jsje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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