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목이 타는 듯 연신 물을 들이켰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료를 뒤적이거나 정면을 응시한 채 검찰과 변호인의 주장을 경청하며 보냈다. 중간중간 마른세수를 했고, 잠시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직접 목소리를 낼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 한 번 있었다. 휴정 중 법원 관계자에게 물 한 병을 더 요청할 때. 그렇게 생수 두 병을 비웠다.
14일 항소심 재판에서 지켜본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의 모습이다. 2주 전 항소심 첫 공판은 물론, 1심 때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회장은 이날 법정에 출석해 5시간을 가만히 앉아 보냈다. 오고 가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오후 전체를 투자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항소심 들어 두 번째, 원심(96회)까지 합하면 98회째 출석이다. 현행법상 피고인은 재판 출석 의무가 있다.
[촬영: 유수진 기자]
삼성이 위기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게 위기론이라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각하다. 사이렌이 회사 안팎에서 모두 울리고 있다. 반도체를 비롯해, 사업 전반의 경쟁력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으며 목표 주가를 내리는 증권사 리포트가 잇따르더니 결국 안에서도 '탈'을 인정했다. 보통 밖에서 위기를 말해도 내부에선 부정하는 게 재계 문법인데 이번엔 달랐다.
반도체 수장인 전영현 부회장이 사과를 했다. 삼성전자 대표이사(내정자)가 실적 앞에 고개를 숙인 건 이례적이란 표현으로 충분치 않은, 처음 있는 일이다. '처음'은 언제나 어려운데 그게 하필 사과라니 전 부회장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을까 싶다. 영업실적이 당초 시장의 기대는 물론, 낮춰 잡은 숫자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니 달리 방도가 없었을 거란 분석이다. 벌써부터 연말 인사 키워드로 '신상필벌' '대규모'가 거론되는 것만 봐도 내부에서 지금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고경영진의 처절한 반성문에도 외국인의 '팔자' 행렬은 멈추지 않고, 주가는 여전히 연저 수준이다. 심지어 최근엔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 최고의 직장' 1위 자리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에 내줬다. 반도체가 전 국민의 관심사다 보니 야당을 중심으로 이 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러 문제점을 진단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무엇 하나 삼성과 이 회장에게 우호적인 소식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성 위기의 한 축은 이 회장이 담당한다. 글자 그대로 '오너 리스크'다. 오너경영 체제인 삼성그룹에서 오랫동안 총수가 사법 족쇄에 묶여 있으니 자연히 불거지는 문제다. 물리적으로 온전히 회사에만 신경 쓸 수 없어 숱한 악재에도 책임경영이 요원하다.
물론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건 아니다. 미등기임원 신분으로 바쁘게 국내외를 오가며 경영활동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한계가 불가피하다. 시장에 명확한 시그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성장기에 있는 글로벌 IT 기업에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대형 인수합병(M&A)이 몇 년째 없는 건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 외엔 설명이 안 된다. 초격차 기술력을 잃은 것, 조직 분위기가 전에 없이 해이해진 것도 마찬가지다. '1등'을 되찾기 위한 드라이브가 시급한 삼성 입장에선 이 회장과 그가 처한 상황이 부담일 수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렇다면 이 회장 리스크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지배구조다. 검찰이 이 회장을 부당 합병·회계 부정 혐의 등으로 기소한 건 삼성 승계 과정에 불법이 있었다는 의심에 기반을 둔다. 실제 현행법 저촉 여부를 떠나 경영권 이양 등을 위한 지배구조 구축 과정에서 보다 높은 도덕성과 투명성을 기대하는 시대적 요구와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해 생긴 일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이 회장도 이를 잘 알고 있다. 2020년 대국민 사과를 하며 "이제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며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오너경영을 자기 대(代)에서 끝내고 이후 삼성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이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이사회 중심 경영을 펴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오너의 영향력이 작아지면 당연히 리스크도 줄어든다. 총수이자 아버지로서 삼성과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어렵게 내린 결정으로 해석됐다.
최소 20년 이상 훗날의 일이다. 이에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 시작했다. 삼성은 지난해 10월 26일 이사회 중심 책임경영을 위해 '선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이 회장의 취임 1주년(27일)을 하루 앞두고서다. 선임 사외이사 제도는 이사회의 독립성과 위상 제고에 긍정적이다.
투명 경영에 대한 이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조치로 알려진다. 1년 전 취임 당시 한 "국민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뢰받고 사랑받는 기업을 만들어보겠다"던 약속을 지키려는 의도란 해석도 있었다. 이 회장은 2022년 10월27일 재판을 마치고 나오며 취임 소감을 묻는 말에 이같이 답했다. 이날 오전 삼성전자 이사회가 이 회장의 취임을 결정했고, 별도의 취임식이나 취임사는 없었다.
남은 재판 일정대로라면 이 회장은 오는 28일에 99번째 출석을 한다. 회장 취임 2주년(27일)의 다음 날이자 이건희 선대회장 4주기(25일)의 사흘 뒤다. 삼성의 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그 어느 때보다 이 회장의 입을 바라보는 눈이 많다. 삼성이 직면한 각종 리스크를 털어내기 위해 이 회장은 어떤 선택을 할까. (기업금융부 유수진 기자)
sjyoo@yna.co.kr
유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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