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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사장의 건배사

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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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건배사'를 고민해봤을 것 같다. 꼭 술을 즐기지 않더라도 말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나누는 짤막한 건배사 한마디는 참석자 간 결속을 강화하고 모임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면 건배사는 '별것 아닌데 별것'이다.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 은근히 까다롭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되 유치하지 않아야 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직관적이어야 한다.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면 참석자 연령대를 고려하는 건 필수다. 여기에 '센스'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 앞뒤로 라임을 맞춘 '이멤버 리멤버'와 촌스럽지만 정겨운 '청춘은 바로 지금, 청바지'가 괜히 스테디셀러인 게 아니다.

물론 모든 건배사가 다 그렇진 않다. 경우에 따라선 평소 가진 철학이나 소신을 밝히는 기회로 활용되기도 한다. 참석자들의 눈과 귀가 오롯이 집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공적인 자리에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는 게 효과적이다.

삼성전자[005930] 반도체 사장이 건배사를 했다. 시스템LSI 사업부를 맡고 있는 박용인 사장이다. 22일 저녁 강남구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제17회 반도체의 날' 기념식에서다.

국내 반도체업계 관계자들이 매년 한 차례씩 모여 협력을 논의하고 네트워킹을 쌓는 자리다. 반도체 산업 발전에 기여한 산·학·연 종사자를 선정해 포상도 한다. 박 사장은 행사를 주관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건배사 하는 박용인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장(사장)

[촬영: 유수진 기자]

사회자의 호명에 자리에서 일어난 박 사장은 흔쾌히 마이크를 잡았다. 미리 준비해온 듯 휴대전화도 펼쳤다. 그리고 협회장인 곽노정 SK하이닉스[000660] 대표이사(사장)를 비롯해, 바쁜 시간을 쪼개 자리를 빛내준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전한 뒤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없던 기술, 새로운 기술을 하다 보면 많은 난관에 부딪힙니다. 우리 모두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두려워하지 말고 힘차게 같이 도전합시다."

이어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이라고 선창했다. 나머지 참석자들이 큰 목소리로 "K반도체"를 한 글자씩 또박또박 외치며 이날의 건배사가 완성됐다. 모두가 잔을 부딪치며 서로를 격려하고 내일을 응원했다.

사실 국내 반도체업계는 요새 축배를 들 분위기가 아니다. 첨단 반도체 시장 선점을 위한 글로벌 경쟁이 갈수록 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반도체기업의 급격한 성장에 따른 공급 과잉을 점친 '반도체 겨울론'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존재한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등은 반도체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다. 곽노정 협회장이 "지금 반도체 패권 경쟁은 단순한 경제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의 사활을 건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했을 정도다.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는 특히나 상황이 심각하다.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막론하고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앞서왔지만, 미래를 장담할 순 없다는 위기감이 확산하는 모습이다. 반도체 수장이 직접 사과문을 내고 '경쟁력 복원'을 약속했는데도 시장의 의심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외국인이 30일 연속 '팔자' 행렬을 이어가며 주가는 또다시 52주 신저가를 경신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직 내부 분위기도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다고 한다. 벌써 연말 고강도 인사설이 심심찮게 돌고 있다. 주요 임원들은 필수가 아닌 외부 일정을 최대한 줄이는 등 '몸 사리기'에 돌입했다. 하루가 멀다고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삼성 위기론'에 임직원의 동요와 그에 따른 사기 저하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박 사장도 이 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이날 틈틈이 이어진 기자들의 질문에 최대한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시스템LSI의 차세대 제품인 엑시노스 2500 수율 개선과 HBM4 로직다이 개발 현황에 대해 "열심히 하겠다"며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사실상 박 사장이 본인의 속마음을 피력한 발언은 건배사가 유일했다고 볼 수 있다. 함께 고생하고 있는 업계 선후배와 동료들은 물론, 삼성 임직원들에게도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지금의 위기에 흔들리지 말고 좀 더 힘을 내 같이 앞으로 나아가자고. (산업부 유수진 기자)

sj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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