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가계대출 관리에 있어 정부가 생각하는 최고의 정책은 실제 규제를 시행하지 않고도 그만큼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언제든지 카드를 꺼내 들 수 있다는 시그널만 주는데도 시장이 알아서 반응하는 것, 충분히 시간을 버는 동시에 욕도 비교적 덜 먹는, 정부가 생각하는 이른바 '잘하는' 정책이다.
전세대출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 그렇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 30일 기자간담회에서 전세대출 규제 관련해 여러 가지 추측과 혼선이 있는 것 같다는 질문에 "해석이 다양했다면 제가 답변을 굉장히 잘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규제를 하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언제 한다는 것인지 여러 해석이 가능하게 하는 것, 김 위원장의 스스로 '잘했다'는 평가는 아마도 '손에 든 카드'와 같은 의미가 담기지 않았나 싶다.
전세대출은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에서 '딜레마' 같은 존재다. 200조원에 달하는 전세대출을 조여야만 정책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지만 '서민 주거 안정'이라는 명목이 늘 발목을 잡는다.
금융당국은 2015년 DSR 제도를 도입한 이후 비율 조정을 통해 대출 규제를 강화해 왔지만, 전세대출은 손대지 못했다. 2022년 DSR을 소득의 80∼100%에서 40%로 규제 수준을 대폭 강화했을 때도 전세대출은 예외로 뒀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이 전세대출에 DSR 적용을 추진했지만, 실수요자의 반발 등에 가로막혀 대책 발표 직전 관련 내용을 빼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건드려야 하는 게 맞지만, 함부로 그럴 수 없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은 작업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부는 가계부채 관리 기조는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전세자금과 관련 가계대출 규제에 대해 하드랜딩이냐 소프트랜딩이냐 논쟁이 있지만 '갚을 능력만큼 빌려줘야 한다'는 큰 틀에서의 입장은 같다는 게 일관된 기조다.
다만, 이번 정부 들어, 아니 올해 들어서만도 전세대출 규제에 대한 금융당국의 메시지는 김병환 위원장의 표현처럼 '굉장히 섬세하게' 바뀌어 왔다. 금융위는 올 초 업무보고에서 가계부채 관리를 위해 전세대출을 DSR 규제에 포함하겠다며, 이를 연내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었다. 당시 김주현 위원장은 "전세대출에 DSR 적용이 안 되고 있어 최근 가계부채 문제의 주요한 요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DSR은 가계부채 관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고, 그런 관점에서 전세대출에도 DSR 규제를 적용하는 게 맞다"라고까지 했다. DSR 적용 시 유주택자의 전세대출 이자상환분을 적용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대상도 언급했다.
명확한 규제 도입 일정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금융위가 '연내'라고 못 박은 탓에 서민들은 가계대출 추이가 증가할 때마다 금융당국의 '입'만 쳐다봤다. 올 상반기 전세사기·깡통전세 등으로 대출금을 갚지 못한 차주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전세대출에도 DSR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또 나왔지만, 당국은 서민 실수요자들의 불이익이나 피해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결정할 문제라며 미뤘다.
완만하던 가계대출 증가세가 올 하반기 들어 폭증하기 시작하자 정부도 바빠졌다. 7월 취임한 김 위원장은 청문회 모두발언에서 가계부채 관리와 관련해 'DSR 제도 내실화'라는 표현을 가장 먼저 꺼냈다. 금융위가 국회 정무위원회에 가계부채 관리를 위해 DSR 적용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방안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 시기와 비슷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김 위원장이 금융리스크 점검회의에서 DSR 범위 확대 등 DSR 중심의 가계부채 관리체계를 강화하겠다고 언급했다. 시장은 금융위가 연초 언급한 전세대출의 DSR 적용시기가 임박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7~8월 가계대출 잔액이 사상 최대치로 불어나면서 금융위의 '메시지'는 점점 강해졌다. 금융위는 하반기 가계부채 관리방안, 가계부채 점검 회의 등을 통해 "필요시 DSR 적용범위 확대"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면 신속히 준비" "가계부채가 빠르게 증가할 경우 검토 중인 관리 수단을 적기에 과감하게 시행"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추가적인 가계부채 관리 수단을 검토" 식으로 메시지 수위를 높여왔다.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정책 및 전세대출 차주의 DSR 산출을 세분화한 데이터를 요청한 것도 전세대출 규제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여겨졌다. 4분기 들어 정부가 발표한 '연내'라는 기한이 임박해 오면서 전세대출 규제에 대한 정부 입장에 다시 관심이 집중됐다.
김 위원장은 전일 전세대출 규제에 대해 "어떤 속도로, 또는 어느 시기에 해야 하냐는 문제는 굉장히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면서 "지금 언제 하겠다 말겠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변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아마 스트레스 DSR 시행 등 일부 조치로 9월 들어 가계대출 증가세가 다소 둔화하자 당장 꺼내 들지 않아도 된 카드가 된 모양이다. '업무보고에서 연내 도입한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 위원장은 "당시에도 '검토'라고 표현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며 정부의 규제 관리 비법을 간접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했다.
시장 상황이 바뀌면 정부의 정책도 변할 수 있다. 규제를 안 하고도 가계부채를 관리할 수준이 되면 그보다 더 좋을 게 없다. 정부는 모든 시나리오별 대책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적기에 카드를 써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적정 시점'이라는 게 과연 언제냐가 항상 문제다.
금융위 기조대로라면 아직은 전세대출에 DSR 규제를 적용해야 할 '적기'가 아닌가 보다. 이번에도 전세대출에 DSR 규제 적용을 결정하지 못하더라도 아마 "그래도 우리는 잘 못한건 없다"고 할 것이다. 검토만 했을 뿐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한 게 없기 때문에 잘잘못을 따지기도 어렵다.
가계부채 2천조원 시대에 전세대출이 가계부채 급증의 주요 원인임이 명확해진 상황에서 정책 목표의 명확성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경제부 이현정 기자)
hjlee@yna.co.kr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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