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아들'보다 '아버지' 역할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960년생으로 환갑을 한참 넘긴 데다, 부친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이 1998년 별세한 만큼 '자식으로서의' 모습을 볼일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모친 박계희 여사는 최 선대회장보다 한해 먼저 작고했다.
장성한 자녀의 존재도 이 같은 인식에 힘을 보탰다. 지난달 둘째 딸 민정씨가 결혼을 했다. 최 회장은 2017년 장녀 결혼식 이후 7년 만에 다시 혼주석에 앉았다. 아버지니까 가능한 일이다.
사회적 지위도 한몫하는 것 같다. 최 회장은 SK그룹 회장이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다. 4대 그룹은 물론, 범위를 더 넓히더라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오너 경영인 중 단연 '맏형'이다. '아들'보단 '아버지'에 가까운 단어다.
그런 최 회장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봤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이 26일 개최한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다. 최 선대회장은 '십년수목 백년수인(十年樹木 百年樹人)'의 신념으로 지난 1974년 민간 최초의 해외 유학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30년 뒤 경제 대국이 됐을 때 지속해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세계적인 학자를 키워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특히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한다는 차원에서 재단 명에 회사 이름(SK)을 넣지 말라고 했다. 출범 초기 후원자를 밝히지 않아 이상한 종교 단체나 중앙정보부에서 지원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 선대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작은 아버지가 했지만, 발전은 아들이 시키고 있다. 최 회장은 1998년 2대 이사장을 맡아 선대회장의 유지를 이어오고 있다. 햇수로 벌써 27년째다. 과거 해외 유학 지원에 집중됐던 사업이 지금은 국제학술교류와 청소년 대상 지식 나눔 등으로 확장됐다. 최 회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매년 10월 열리는 재단 홈커밍데이엔 만사 제쳐두고 참석할 정도로 애정이 크다.
[촬영: 유수진 기자]
그렇게 부자(父子)의 손을 거친 50년 동안 재단에선 1천여명에 가까운 박사 학위자와 5천명이 넘는 인재가 배출됐다. 이들은 정치와 경제, 교육, 문화 등을 막론하고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날 기념식에는 재단 장학생 출신들이 대거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들은 해외 유학이 흔치 않았던 시절부터 아무 조건 없이 학업을 지원해준 재단과 두 이사장에게 한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대학생들이 최 회장을 헹가래 치기도 했다.
뜻깊은 날인 만큼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최 선대회장의 모습을 복원한 영상도 상영됐다. 최 회장은 화면을 가득 채운 부친의 모습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엔 울컥한 듯 눈가를 매만졌지만, 곧이어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손뼉을 치며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최 회장에게 최 선대회장은 '아버지'이자 '선배 기업인'이다. 지금보다 어렵던 시절 밑바닥부터 회사를 일구고 키워낸 업적을 존경하는 만큼, 그런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정받고 싶은, 혹은 한 번쯤은 뛰어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아들 기업인이 아버지 기업인에게 자연스레 느끼는 감정이다.
지난 2018년 선대회장 20주기 추모행사 당시 "SK[034730]가 이만큼 성장한 것 자체가 선대회장이 훌륭한 경영인이셨다는 점을 증명한다"며 "저 자신이 훌륭한 경영자라는 것은 아직 입증하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훌륭한 경영자임은 입증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선대회장 생전에 좀 더 인정받지 못한 점을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이날 최 회장은 "영상 중 선대회장이 '최태원 이사장 수고했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절대로 그런 얘기를 하실 리 없다"며 "오히려 '이것밖에 못 하나' '더 잘해라'라고 야단을 치실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가 아닌데' 싶었다"며 미소를 보였다.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 아쉬움, 더 잘하고자 하는 의지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듯 보였다.
[촬영: 유수진 기자]
그러나 '아들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은 별개가 아니었다. 서로 맞닿아있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최 회장의 두 자녀가 함께 자리했다. 장녀인 최윤정 SK바이오팜[326030] 사업개발본부장과 장남 최인근 패스키 매니저다. 이렇게 세 사람이 공식 행사에 참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자연스레 선대회장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 최 선대회장은 재단 장학생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항상 최 회장을 불렀다고 한다. 밤새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구체적인 이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가까이서 보고 배우라는 무언의 압박 같은 걸로 짐작할 수 있다.
최 회장 역시 자녀와 함께 참석한 이유에 대해 "이것은 레거시(유산) 같은 것"이라며 "할아버지가 무엇을 했고, 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 자꾸 보고 배우고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 세대는 본인들이 알아서 기획해 나가야 하는 거니 약간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했다"고도 덧붙였다.
그제야 최 회장이 왜 이토록 재단에 애정을 갖고, 인재 양성에 집중하는지 이해가 됐다. 그에게 재단 활동은 단순한 사회 공헌 그 이상의 의미였다.
아버지의 뜻을 널리 알리고 실천하며,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에 선순환을 만들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박수를 받는 것. 이것이 최 회장이 아버지를 기억하고 기리는 방식이자, 30년 가까이 멈추지 않고 있는 '아들 노릇'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이 유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듯했다. '아버지'로서 말이다. 최 회장은 말했다. "저도 언젠가 AI로 영상에 나오게 되면 (아버지와) 똑같이 그런 얘기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잘해라. 좀 더 잘하자' 이렇게 말입니다." (산업부 유수진 기자)
sjyoo@yna.co.kr
유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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