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상법 개정 언급하던 정부,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선회
"주주보호 첫 단추는 상법…유능한 이사 많이 나와야"
(서울=연합인포맥스) 김학성 기자 = 정부는 올해 기업가치 제고를 목표로 '밸류업' 정책을 들고나왔지만, 정작 그 핵심으로 꼽히는 상법 개정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부는 모든 기업에 적용되는 상법 대신 상장사만 규율하는 자본시장법을 개정해 일반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접근이 오히려 개악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연합뉴스TV 제공]
19일 정부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지난 2일 일반주주 이익 보호 강화를 위해 상법이 아닌 자본시장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자본거래 시 이사회 의견을 투명하게 제공하고, 모든 합병에 외부평가기관에 의한 평가를 의무화하며, 상장법인 간 합병가액 산정 시 주가뿐 아니라 자산가치와 수익가치 등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게 한다는 것이 골자다. 물적분할한 자회사를 상장할 때 모회사 일반주주에게 신주를 우선 배정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는 올해 초 정부가 상법 개정을 통해 주주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했던 것과 비교해 후퇴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증시 개장식에 참석해 "소액주주의 이익 제고를 위한 상법 개정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도 개선이 요구된다면서 여러 차례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를 중심으로 상법 개정이 소송 남발과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 급증으로 이어져 기업 경영의 어려움을 가중할 것이라는 반발이 나오면서 정부는 최근 입장을 바꿨다.
기업거버넌스 전문가들은 정부가 내놓은 자본시장법 개정만으로는 주주 보호가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개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일반 원칙을 담은 상법 개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한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지난 3일 배포한 논평에서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상법상 주주 충실의무를 대신하려는 것은 상법 개정 논의가 왜 나왔으며 그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며 "기존에 문제가 된 합병이나 분할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앞으로 어떤 다른 유형의 일반주주 이익 침해 사례가 나오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기본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광중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는 지난달 28일 상법 개정 완수 촉구 기자회견에서 "(상법을 놔두고 자본시장법만 개정하겠다는 건) 교통신호를 고속도로에서만 지키고 일반도로에서는 안 지켜도 된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천경훈·정준혁 교수는 지난달 말 발표한 논문에서 "회사와 주주 전체에 대한 충실의무를 함께 인정하면 이사 의무의 내용을 불명확하게 하고 불필요한 논란을 발생시킬 우려가 있다"면서도 "회사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주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규범으로 자리 잡고 우리나라 자본시장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주주 보호 의무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올해 발표된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재편과 SK이노베이션[096770]-SK E&S 합병, 한화에너지의 ㈜한화[000880] 공개매수, 고려아연의 일반공모 유상증자 등 대기업의 자본거래 사례들도 주주 보호 강화를 명시하는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부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달 초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정부의 정책 추진 동력이 약화한 데다 외국인 투자자의 한국 시장 '엑시트'가 잦아들지 않으면서 상법 개정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가 위기에 몰리면서 상법 개정 가능성이 커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주주 보호 측면에서 첫 번째 단추로 꼭 해야 하는 것이 상법 개정"이라면서 최근 정치 상황 변화로 인해 상법 개정 가능성이 이전보다 커진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상법이 개정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며 "주주의 권리를 인지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사들이 많이 배출돼야 하는데, 이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상법 개정을 당론으로 채택한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국회에서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다. 좌장은 이재명 대표가 맡는다.
hskim@yna.co.kr
김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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