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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세연의 프리즘] 금융억압의 시대

2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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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전 세계는 '빚과의 전쟁' 중이다. 지나치게 빚에 의존해 자기 처지 이상으로 사는 각국 시민들, 사회 문제로 비화한 이들은 구제해야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벌이보다 씀씀이가 커진 집안 살림처럼 언제부턴가 국가 재정에서도 수입보다 지출이 커졌다. 수년간 누적된 국가 부채라는 이 거대한 문제는 이제 외면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직면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 속에서 해결 방법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바로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이다. 미국 정부가 사상 최대로 불어난 37조달러 규모의 국가부채를 직접 갚지 않고 사실상 희석해버리는 방법이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퍼지는 정부의 숨겨진 전략.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금융억압의 시대에 살아야 한다.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관세 전쟁 카드를 내세웠다. 전방위적인 관세 부과에 미국은 1년 사이 두 배 이상의 관세 수입을 올렸지만, 국가부채 이자는 사상 처음으로 1조달러를 돌파했다. 공공부채가 늘고 금리가 오른 영향이다.

금융억압은 정부가 금융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시장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현상을 말한다.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했다면 다른 곳으로 향했을 자금을 정책 수단을 동원해 정부의 목표 달성을 위해 끌어오는 경우를 말한다. 최근에는 정부의 부채 부담을 줄이려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명목금리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거나, 실질금리를 마이너스가 되도록 유도하는 형식이다.

미국 연준은 이미 장기금리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수익률곡선 통제(YCC)를 준비한다. YCC는 중앙은행이 특정 만기 국채금리에 상한선을 긋고, 그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국채 매입을 약속하는 정책이다. 중앙은행이 매입할 채권의 양을 사전에 정하는 양적완화(QE)와 달리 사실상 무제한 매입으로 목표한 금리 상한을 지키겠다는 결기다. 트럼프 행정부는 연준의 금리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을 넘어 비전통적인 수단인 YCC 정책까지 강제하는 방안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1942~1951년, 미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을 치른 대가로 장기 국채금리를 2.5%로 묶어뒀다. 연준의 무제한 채권 매입 등으로 단기금리도 고정했다. 최근 트럼프의 연준 압박이 1940년대 금융억압의 현대적 재현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은행도 과거 YCC 정책을 폈다.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미 국채 수요도 트럼프가 믿는 구석이다. 2기 트럼프 행정부에서 구멍 난 정부 재정을 메우는 일에 중앙은행을 동원할 날이 머지않았다.

정부로서는 세금 카드도 쓸 수 있지만, 세금을 올리면 표를 잃고, 반대로 지출을 줄여도 표를 잃는다. 이미 국민들에게 세금을 더 걷고 복지 등을 줄여서 이자를 줄이는 방안을 선택한 일본 이시바 정권, 프랑스 바이루 총리, 영국 보수당 등은 모두 권력을 잃었다.

물가 상승률보다 낮은 이자를 강제로 유인하는 길밖에 없다. 실제 이를 주장한 세력은 득세하고 있다. 일본의 다카이치, 프랑스의 극우 국민연합 등이다.

40년간 방만하게 써온 재정을 메우려는 움직임, 금융억압 속에서 투자자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금융억압 시기에는 실물 자산만이 부를 지킨다고 말하는 역사를 떠올리며 금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금을 따르는 은, 디지털 금인 비트코인도 강세다. 워싱턴은 투자자들이 여전히 국채를 살 거라고 기대하지만, 월가와 큰손들은 금, 은, 비트코인으로 달아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미국 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에다 빅테크 기업의 AI 투자에 따른 반도체 사이클로 주식 등 위험자산 강세도 이끌고 있다.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이 동시에 오르는 에브리씽 랠리도 금융억압과 무관치 않다.

"아베노믹스를 지지하는 다카이치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엔화는 급락했다. 아베 시절 일본 물가가 0%대였지만 지금은 3%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에 장기금리는 오히려 급등했다. 그러자 일본 당국은 개입을 통해 장기물을 눌렀다. 단기든 장기든 금리가 튀면 일본 정부의 이자 부담은 늘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금리 인하뿐만 아니라 장기물도 누를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아주 전형적인 금융억압의 모습이다. 하지만 따르는 부작용도 있다. 바로 화폐가치 하락이다. 물가보다 훨씬 금리를 낮게 주는데 여기에 머무를 사람이 있겠는가. 그럼 화폐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주식, 부동산, 귀금속 등 각종 자산으로 대규모 자금이 이동한다. 바로 '엔화 약세+자산 가격 강세'의 조합이다.

거대 부채와 금리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결국 지금 일본의 모습은 미래에 전 세계에서 보게 될 일들의 '예고편'일 뿐이다"

KB증권 이은택 연구원은 이렇게 분석했다. 금융억압은 정부의 음모 같은 게 아니라 급증하는 이자 비용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정부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또 국민들도 눈앞의 증세, 복지축소에 반발하고 극단적 세력을 지지하는 등 모두가 금융억압을 선택하는 꼴이 된다.

금융억압은 어쩌면 우리에게 돈이 아니라 방향을 묻는 것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 안에서 질서의 변화와 새로운 구조를 읽고 있다. 억압의 시대에도 기회는 늘 움직인다. 이제는 '보이는 숫자'보다 '숨은 방향'을 봐야 할 때다. (증권부장)

sykwak@yna.co.kr

곽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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