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잠수함을 만난 건 운명이었습니다"
1982년 10월, 창원기계공고 졸업을 앞두고 진로 고민이 한창이었던 그는 무작정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의 옥포조선소를 찾았다.
'일자리가 많다더라'는 소리에 간 곳에서 3개월의 수습 생활 후 7년의 시간을 상선에서 보냈지만, 밥벌이에 대한 고민은 여전했다.
일반 상선보단 액화천연가스(LNG)선과 드릴십, 반잠수식 시추선 등 복잡한 기술이 필요한 특수선박 건조에 강했던 옥포조선소에선, 그즈음 잠수함에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가 풍문처럼 들렸다.
어느새 기능사원이 돼 있던 그는 홀린 듯 새로 생긴 잠수함 부서에 손을 들었고 만 43년의 세월을 잠수함에서 보낸 뒤 이달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지난 4일 중구 대한상의에서 만난 정한구(60) 기원(技員·생산직 최고 감독자 직급)은 35년 전 방문했던 독일 하데베(HDW) 조선소 이야기를 꺼냈다.
정 기원은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타고 간 곳에서 생전 처음 잠수함의 실물을 봤다"며 "운명 같았다. 둥근 물체 안에 어마하게 복잡한 설비가 가득한 것을 보고 흥분했다"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북한의 잠수함 기술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1987년 사업을 시작하며 독일 하데베 조선소와 손을 잡았다.
209급 3척을 들여오되 1척은 현지에서, 나머지 2척은 설계도와 부품을 들여와 국내에서 짓는 방식이었다.
2차대전 당시 'U보트' 잠수함을 만들며 잠수함 기술의 세계 최강으로 불렸던 하데베 조선소는 보안을 이유로 설계 기술을 안되지만, 건조 기술은 현장 직무실습(OJT)으로 알려줬다.
정 기원이 하데베 조선소로 6개월간의 OJT를 떠난 것은 1991년의 일이다.
그는 "OJT로 여러 나라가 하데베를 찾았지만, 건조 기술을 넘어 설계 기술, 건조까지 성공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며 "K잠수함 역사의 시작"이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배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보안을 이유로 자료 제공을 꺼렸던 하데베 조선소에선 그저 눈으로 익힐 수밖에 없었다.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수첩과 볼펜뿐이었다.
그 무렵 정 기원은 잠수함 핵심 장비인 소나(음파탐지기)에서 이어지는 수백 가닥의 케이블 설치 작업을 담당할 때였다.
잠수함의 케이블 설치는 사람 하나 들어가 앉기도 녹록지 않은 좁고 어두운 곳에서 이어지는 작업의 연속이다.
잠수함 내 평균 10km가 넘는 케이블이 수만개의 정보를 전달하는 까닭에 엄청난 집중력과 정확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정 기원은 "OJT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수백 가닥의 케이블을 일일이 그리며 밤새 익혔다"며 "오로지 음파를 이용해 표적을 탐지하는 잠수함에서 눈과 귀를 다는 마음으로 케이블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정 기원은 독일에서 국내로 처음 수입되는 잠수함으로 생산된 1번함 장보고함 건조에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2번함 이천함 건조에도 참여했다.
그렇게 총 9척의 잠수함을 건조했고, 이는 대한민국 잠수함 21척의 절반 수준에 이르는 경험이 됐다.
이 과정에서 정 기원이 그렸던 케이블 지도는 건조 지침서가 됐다.
건조에 참여하는 잠수함이 늘수록 정 기원의 역할도 커졌다. 케이블 설치를 기반으로 센서·무장·통신·항해를 총망라했다. 실제로 탄을 장착해 발사 실험을 하기도 했다.
정 기원은 "개발자는 아니지만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험한 일이 많았다"며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었다"고 떠올렸다.
'이지스 전투 체계'(Aegis Combat System)를 탑재한 군함인 이지함 구축을 앞뒀던 2008년에는 미국 록히드마틴에서 교육받기도 했다.
이지스 전투 체계는 록히드마틴이 개발한 첨단 방공·대(對)함정·잠수함 통합 시스템이다.
고성능 위상배열 레이더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수백개의 목표를 탐지·추적해 여러 표적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
정 기원은 당시 열 명 남짓한 생산직 선후배들과 4개월간 합숙하며 전투체계 시스템 전반을 익히며 구현했다.
이런 경험과 노하우는 훗날 2023년 조선·해양의 날 '우수 조선해양인 상'을 수상하며 재차 인정받았다.
또한 올해 무역의 날을 맞이해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한 산업역군 초청 오찬에도 함께했다.
정 기원은 "K잠수함이 지금에서야 주목받고 있지만 이전부터 기술력은 최고였다"며 "미국, 영국, 프랑스 모두 100년 넘는 기술의 역사가 있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데는 대한민국을 따라오기 어렵다"며 K잠수함의 위상을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독일이 포기할 때도 한국의 기술인들은 어떻게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다"며 "눈썰미, 손기술, 수용력, 상상력 모두 우리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K잠수함의 새 시대를 열 핵추진 잠수함 역시 국내 건조가 무리 없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한화오션은 3년 전부터 태스크포스 팀(TFT)을 통해 핵추진 잠수함 시대를 준비해왔다.
정 기원은 "핵잠수함은 K잠수함 시대의 새 페이지를 열 주역으로 일찌감치 업계가 내다봤다"며 "우리가 만든 핵잠수함이 세계 각국으로 수출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내다봤다.
마지막으로 정 기원은 K잠수함의 증강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정 기원은 "대부분의 부품이 국산화됐지만, 아직 여러 이유로 수입하는 필수 부품들이 있다"며 "안보나 정치 역학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기업이 따질 수밖에 없는 경제성도 이유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잠수함과 같은 방산 영역은 연구개발(연구·개발)은 물론 계약 과정까지 세심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K잠수함, K방산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우리 해군의 잠수함 시대를 연 대한민국 1번 잠수함 장보고함이 19일 마지막 항해를 위해 진해군항을 출항하고 있다. 2025.11.19 [해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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