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에는 자경단(bond market vigilantes)이 있다고 한다. 정부 재정지출이 방만해지면 채권을 매도하여 금리를 올려서 정부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는 투자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최근 일본 장기국채의 금리 상승이나 2022년 말 영국 장기국채의 금리 급등을 보면 이해가 되는 말이다.
본래 경제의 구조조정이나 개혁은 무척 어렵다. 구조조정 자체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국민에게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조정이나 개혁을 하려면 그것을 추진하는 집단이 매우 강한 정치적 자본, 다시 말해 매우 강력하고 넓은 지지층을 가지고 있어야 성공적인 개혁을 할 수 있다.
개혁과 구조조정을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나라는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효율적인 자원배분 체계를 유지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시장에 의한 선택이 이런 구조조정을 담당하는데, 전술한 채권시장 자경단도 한 예라고 하겠다.
현존하는 국가 중에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을 가장 잘하는 나라 중 하나가 미국일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설 때만 해도 위용을 자랑하던 많은 대기업들이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해 스러지고, 정보·통신 기술을 바탕으로 한 빅테크 기업들이 주식시장 시가총액 상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 경제의 역동성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끊임없는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의 힘에 감탄한다. 그리고, 그 시장을 신뢰하고 투자하게 된다.
한국 주식시장이 미국 주식시장보다 역동적이면서 더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던 시절도 있었다. 2000년부터 2010년 정도까지가 그랬다. 전술한 바처럼 엄청난 정치적 자본이 필요한 강력한 구조조정을, 아시아 금융위기라는 특수한 상황과 IMF라는 외부 권위를 이용하여 아주 혹독하고 철저하게 시행한 후,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이라는 호재를 타고 종합주가지수가 외환위기 직후 400 미만에서 2007년 2000까지 급등하였다. 같은 기간 미국 주식시장은 커다란 레인지 안에서 고점을 경신하지 못했고 많은 투자자금이 한국으로 밀려들었었다. 그래서 당시 원화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통화 중 하나였다. 즉 IMF 외환위기는 그 후 장기간의 주식시장 강세의 초석이 되었던 구조조정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소위 '위장된 축복'이었다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대외 건전성 위기 이후 정부와 민간은 외환 부문 건전성 강화에 매진하였고, 그 결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는 대외부문의 건전성 문제는 현저히 감소하여, 이제는 국내 경제에 문제가 있더라도 외환 관련 위기가 발생하기는 무척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축복이었을까. 후술하는 바와 같이 대외부문 위기의 부재가 역설적으로 개혁을 위한 정치적 자본 확보를 어렵게 했다는 점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외환위기와 IMF의 권위를 빌려, 어찌 보면 과도하게 강력한 구조조정을 했었고, 그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거의 없었다. 대외부문의 국가부도 상황이라는 형태로 도래하였고, 그 엄중한 상황에서는 개혁에 반대하기 어려웠다. 당장 살고 봐야 하니까. 그런데 대외부문이 매우 건전해진 이후로는 과거와 같은 대외부문의 위기는 생기기 어렵게 되었고, 문제가 생긴다 해도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2022년 4분기처럼 금융시장에 문제가 생겨도 해외에 예치된 자금을 환류시켜 외환관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위기의 강도가 낮았던 관계로 관련된 구조조정을 아주 철저히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문제를 해는 쪽으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행태는 미흡한 거버넌스 문제와 결합하여 주식시장의 저성과를 낳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시장가격 움직임은 별다른 경고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외환시장에서 눈에 띄게 불안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과거처럼 외국인 투자자의 움직임이 아니라 국내 투자자들의 움직임으로 말이다. 많이 회자되고 있는 투자이민, 즉 해외 투자의 급격한 증가가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국내 투자자의 이러한 행동은 채권시장의 자경단의 행동과 유사하다. 시장원리에 의한 구조조정을 게을리하고 거버넌스가 미흡한 국내 주식을 매도함으로써 주식시장에 경종을 울렸다. 과거 같으면 국내 투자자들의 행동은 여기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국내 투자자들에게는 해외시장이라는 대안이 생겼고, 원화를 매도하고 달러를 적극 매수하여 해외투자를 폭발적으로 늘림으로써 외환시장에도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러한 투자자들의 행동에 비시장적 방법으로 대응하는 정책의 효과는 매우 일시적일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투자자들이 경종을 울리는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할 터인데, 이는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국내 자본시장의 기대수익률 향상이다. 마침 최근에 국내 주식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가 시행되고 있는데,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다만, 주식시장 활성화는 소액주주 보호를 통한 밸류에이션 증가(멀티플 증가 혹은 PER, PBR 증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주가 상승은 상장사의 이익 증가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장사 이익 증가는 자본의 효율적 배분의 뒷면인데, 자본의 효율적 배분은 결국 시장에 의한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크게 다른 말이 아니다.
내국인 투자자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한국 자본시장에 출현하였다. 이 자경단들은 미흡했던 구조조정과 비시장적 의사결정이 초래한 저조한 성과의 한국 자본시장을 떠나면서 환율을 상승시켜 시장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구조조정과 시장 논리에 의한 경제정책 추진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자본형성에 일조하게 된다면, 이것을 또 하나의 위장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창범 전 KB국민은행 부행장)
ywshin@yna.co.kr
신윤우
ywsh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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