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미국 중앙은행 수장과 대통령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전개되자 19세기 '은행 전쟁(Bank War)'이 떠오른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은행 전쟁이란 포퓰리스트였던 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이 중앙은행을 사실상 해체시킨 사건을 말한다.
영미전쟁(1812~1815년)을 겪은 후 미국은 부채 상환과 통화가치 혼란 수습을 위해 중앙은행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준(準)중앙은행인 제2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을 1816년 설립했다. 현재의 기준에 부합하는 중앙은행은 아니었지만, 정부 예금관리, 통화공급량 조절, 주(州) 은행 규제 등을 수행한 중앙은행적 기능을 가진 은행이었다.
전신은 독립전쟁 이후 재정·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1791년 설립됐던 제1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이다. 초창기에는 제구실을 못하던 제2은행은 1823년 니콜라스 버들(Nicholas Biddle) 총재가 취임한 이후 비로소 안정적인 통화정책을 운용하게 됐다.
하지만 은행 회의론자였던 앤드류 잭슨 대통령(1829~1837년)이 등장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부동산사업을 하던 중 채권자 사기에 휘말려 고생한 경험이 있었던 잭슨 대통령은 은행을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은행이 소수 엘리트와 금융자본가에게만 유리하고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는 '특권을 누리는 조직(privileged institution)'이라고 비판했고, 중앙은행은 이들의 대변자라고 여겼다.
결국 잭슨 대통령은 제2은행의 인가를 연장하는 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재선에 성공한 이후 제2은행에 예치됐던 연방 예산을 주(州) 은행으로 이전했다.
1836년 인가가 만료된 제2은행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 이와 같은 중앙은행 붕괴는 1837년 공황의 한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미국 법무부가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에 대배심 소환장을 발부한 것을 두고 '은행 전쟁'을 떠올리는 이유는 전쟁 후반인 1841년 버들 총재가 체포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2은행이 일반 은행으로 전환된 이후이긴 하나 한때 중앙은행 수장이었던 버들 총재가 사적 이익을 위해 불법적 금융거래를 했다는 의혹으로 대배심에 기소돼 체포됐다.
자신의 이력과 지위를 이용해 제2은행 해체 이후에도 무리한 경영을 했다는 지적이 있는 한편, 정치 투쟁의 희생자라는 평가와 중앙은행 독립성 붕괴가 초래한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다.
어느 각도에 보느냐에 따라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해석은 늘 달라지기 마련이라지만, 어쨌든 대통령과 중앙은행 수장의 갈등이 당시 경제상황에 '플러스' 요인이었다고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파월 의장의 임기 만료 4개월 전에 터져 나온 이번 소환장 발부의 파장이 향후 어디까지 번질지가 관심이다. 표면적 이유는 연준 청사 보수비용을 둘러싼 의혹이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단 당장은 금융시장에서 '셀 아메리카(주가·달러 약세)'는 제한적이다. 전문가들은 설령 대배심이 파월을 기소해도 판결까지 몇 분기, 길게는 수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시장 반응이 미미했다고 본다. 상황을 지켜보자는 심리가 크다.
오히려 이번 사태로 분노한 파월이 연준 의장 임기 만료 이후에도 이사로서 연준에 남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파월의 연준 의장 임기는 올해 5월에 끝나지만 이사직 임기는 2028년 1월에 끝난다. 전임 연준 수장들은 의장직에서 물러나면 연준을 떠났지만 갈등 격화로 파월이 버티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상이다.
트럼프와 같이 기준금리 인하에 우호적이었던 연준 내부 인사들조차 '선을 넘었다'고 인식한다면 독립성 사수를 위해 연준 내부가 결집할 가능성도 있다. 혼란이 지속되면 통화정책 경로에 대한 시계는 점점 흐려진다.
당장의 반응이 미미하다고 해도 금융시장 참가자들은 이번 사태의 추이를 계속 체크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미국에 대한 신뢰를 깎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제평가사 피치가 파월의 기소 가능성이 불거진 이후 연준의 독립성을 'AA+'로 매겨진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로 꼽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국제경제부장)
문정현
jhm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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