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2017년 국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이후 투자 불능에 가까웠던 베네수엘라 국채가 다시 시장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연초 미국의 군사 개입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사실상 붕괴한 이후 베네수엘라 국채 가격이 급등했고, 글로벌 헤지펀드와 자산운용사들이 투자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독일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2026년 10월 만기인 베네수엘라 국채 가격은 지난 16일 기준 달러당 41센트에 거래됐다. 이는 지난해 초부터 중반까지 이 채권이 달러당 15~22센트 수준에서 거래됐던 것 대비 급등한 것이다. 하루 수억 달러 규모의 거래도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격 급등세는 마두로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축출과 미국의 개입으로 시장 참여자들이 부실 채권의 회수 가능성을 재평가하면서 발생했다.
런던과 뉴욕의 일부 헤지펀드들은 "베네수엘라가 이제 '오랜 동면'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했으며, 일부 헤지펀드들도 베네수엘라 채권 투자를 고려하고 있다.
바클레이즈는 베네수엘라 국채에 대한 투자 의견을 '중립'으로 상향 조정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시장의 관심은 한때 유로존 문제아로 낙인찍혔다가 화려하게 부활한 그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는 2009년 10월 이전 정부에서 재정적자를 은폐했다는 사실이 공개되며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국채 가격이 극단적으로 하락했으며 방만한 재정 운영 등으로 2010년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 2012년 3월에는 그리스 10년물 국채금리가 41.5%까지 오르기도 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때 그리스 채권을 회수 불가능한 자산으로 취급했으며, 당시 시장에서는 "유로존 탈퇴"와 "영구 디폴트"라는 말이 공공연히 오갔다. 당시 그리스가 재기할 수 있다고 여긴 이는 드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의 외면을 받던 베네수엘라와 비슷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리스는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 아래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며 당당히 시장에 복귀했다. 세 차례에 걸친 구제금융과 강력한 재정 긴축, 연금·노동·금융 시스템 개혁을 거치면서다. 2018년 구제금융 프로그램 종료 이후 그리스 국채는 점진적으로 신뢰를 회복했고, 최근에는 투자 등급을 회복하며 신용도가 안정적인 국가로 자리 잡았다.
그리스의 사례는 사실상의 국가 디폴트 이후라도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시장에 복귀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최근 시장의 움직임은 미국의 제재 완화와 함께 석유 인프라가 복원된다면 베네수엘라도 그리스와 같은 회복의 사례를 써나갈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기대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 영원한 디폴트가 아닌 구조조정 이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수준의 원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간 제재와 인프라 붕괴로 원유 생산량이 극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미국 제재 완화와 함께 글로벌 주요 석유기업의 참여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정상화 가능성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일부 헤지펀드는 베네수엘라 채권에 대해 "하방은 제한적이고, 상방은 열려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미 가격이 충분히 낮아 추가 하락 가능성은 작으면서 만일 부채 상환 가능성이 열리면 상승 폭은 기대 이상일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다만 베네수엘라가 처한 상황은 그리스보다 조금 더 까다롭다. 방만한 재정 경영만이 문제였던 그리스와 달리 베네수엘라는 금융·사법·행정 시스템 전반이 무너진 상태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4년 말 이후 20년 넘게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평가조차 수행하지 않았다.
비영리단체 애틀랜틱 카운슬은 "IMF나 다른 채권자들은 베네수엘라가 대출을 상환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 없이는 새로운 자금을 제공할 수 없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베네수엘라 정부와 중앙은행이 필요한 정책을 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하며, 베네수엘라의 국가 통계 시스템도 재건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채권자 구조도 복잡하다. 베네수엘라는 국채와 국영석유기업(PDVSA) 채권뿐 아니라 중국 등 양자 차관, 석유 담보 대출, 국제 소송 채권이 뒤엉켜 있다 이해관계자 간 조율은 그리스보다 훨씬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씨티그룹은 "베네수엘라 국채의 지속가능성을 회복하려면 원금 감축이 최소 50% 이상이어야 한다"고 추정했다.
이후의 정치적 불확실성도 크다. 그리스는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속에서도 유로존 잔류라는 큰 틀이 유지됐지만 베네수엘라는 과도 정부의 정당성, 향후 선거, 사회적 불안 가능성 등 변수가 여전히 크다.
시장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를 '제2의 그리스'로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채권자들의 인내와 협상 의지, 국제기구의 참여, 제재 완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오랜 회복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중 일부라도 어긋난다면, 베네수엘라 국채 가격 상승은 그저 시장의 헛된 기대로 끝날 수 있다. (국제경제부 기자)
jykim@yna.co.kr
김지연
jy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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