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과거에 우리가 돈을 믿는 이유는 명확했다. 국채라면 정부가 갚아줄 것이라 믿었고, 예금이라면 은행이, 더 나아가 정부가 보호해줄 것이라고 여겼다. 결제망이라면 중앙은행이 운영하니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즉 '누가 발행하느냐', '누가 보증하느냐'에 신뢰가 싹텄다.
하지만 디지털 화폐,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조금 다르게 작동한다. 여기서는 누군가가 '믿어달라'고 말하지 않고, 그 '믿을 이유'를 시스템 안에 아예 설계해 둔다. '사람을 믿는 구조'가 아니라 '작동하는 구조를 믿는 시스템'이다. 작동 방식 자체가 신뢰를 보여준다. 준비자산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매일 공개되는 데이터로 자동 검증된다. 자산이 부족하면 발행이 차단돼 발행량이 초과하지 않도록 한다. 요청이 들어오면 1대 1로 자동 처리되도록 설계돼 있어 상환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구조를 누가 만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질문이 생기는데, 구조는 민간기업이 설계하지만, 실행은 시스템이 맡고 회계법인과 감사기관이 외부에서 검증하고 공개한다. 블록체인은 누구도 임의로 고칠 수 없고 모든 데이터가 공개돼 있다.
정책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인 지난해 5월 말, 김용범 해시드오픈리서치 CEO가 '디지털 G2를 위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설계도' 서두에 쓴 내용이다. 이는 전통적 관념에만 갇혀 과거에 믿던 돈만 돈이라고 생각했던 굳건한 믿음에 신선한 균열을 가져왔다. 사실 제일 믿지 못할 게 사람이다. 사람보다 훨씬 믿을 건 시스템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26년 2월6일, '작동하는 구조'인 것처럼 보이는 포장 뒤에 숨어 자행해온 '주먹구구 처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나왔다.
'불금' 7시 빗썸 랜덤박스 이벤트가 열렸다. 물건이나 게임 아이템 따위가 무작위로 들어 있는 상자, 랜덤박스 이벤트는 흔한 마케팅 기법 중 하나다. 빗썸은 랜덤박스를 구매하는 사람에게 1인당 2천원에서 5만원의 당첨금을 지급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249명은 이벤트 당첨금을 받았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원이 아닌 BTC(비트코인)로 지급된 것이다. 개인 지갑에는 2천원이어야 할 금액이 2천억원으로, 5만원이 5조원으로 찍혀 있었다.
뜻밖의 횡재를 한 이용자의 인증글이 SNS에 쏟아졌다. 일부는 시장가로 급하게 팔면서 순간 BTC가 15% 급락했다. 글로벌 거래소는 물론 국내 업비트와 비교해도 당시 빗썸의 BTC 시세는 의아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일부 이용자는 패닉셀에 나섰다. 빗썸은 이벤트 시작 35분 뒤 이 사태를 알아채고 차단을 시작했고, 5분 뒤 거래, 출금 차단을 완료했다. 40분이나 걸린 것을 두고 이용자들은 지급 직후에 전혀 몰랐다가 이상거래 감지 시스템이 BTC의 엄청난 시세 변동성을 파악한 뒤 감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명백한 시스템 오류임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도 급히 차익을 챙겼던 86명, 덩달아 패닉셀에 나선 투자자의 매도 물량을 플래시크래시 저가 매수 기회라고 본 이들이 받아냈다. 결국 물량을 받은 이가 이번 사태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여러 의문점이 남지만 가장 이상한 건 유령 코인이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이용자가 위탁해 빗썸이 보유한 BTC 약 4만2천개, 자체 보유 175개 정도다. 그런데 실체가 있지도 않은 62만개가 전산상 지급됐다.
실제 자산 없이 숫자만으로 거래하는 장부거래 탓이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 기반이라 트랜잭션이라는 방식을 통해 블록체인 거래가 이뤄져야 하는데, 안전하지만 수수료가 비싸고 접근이 어렵다. 거래소들은 코인 이동 없이 거래소 DB의 숫자만 고치는 장부거래 방식으로 처리해왔다. 빠르고 편하지만 거래소가 이번처럼 실수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가짜 숫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물론 실수의 책임은 거래소가 진다.
입력 실수가 뱅크런까지 번지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다. 명목상으로는 60조원에 달하는 BTC가 잘못 지급됐지만, 130억원 정도만 되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피해는 제한적이다. 실제 출금된 금액은 30억원 수준, 알트코인 등 다른 코인을 다시 사는 데 쓰인 돈은 약 100억원이다. 글로벌 거래소나 업비트가 아닌 빗썸에서 일어났고, 오입금된 돈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시민의식이 빚어낸 결과다. '워시 충격'으로 급락했던 터라 팔려는 수요가 많지 않았던 시장 상황도 도와줬다.
이번 사태로 그동안 가상자산 시장은 거래소의 놀이터였다는 점을 똑똑이 봤다. 그리고 다시 '작동하는 구조를 믿는 시스템'을 떠올려본다.
문제는 단순한 오지급이 아니다. 구조는 허술했고, 작동은 무력했고, 이를 감시할 시스템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숫자는 찍혔고, 거래는 이뤄졌으며, 누구도 즉시 설명하지 못했다. 블록체인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전통적인 장부거래, 가장 구식의 신뢰 위에 서 있었다. 사람의 실수가 만든 사고가 아니라 실체 없는 가짜 숫자를 신뢰로 착각해온 뼈아픈 구조였다. (증권부장)
sykwak@yna.co.kr
곽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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