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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실존적 위기에 처한 암호화폐거래소

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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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탈중앙화 없는 거래소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지 설명해야

(서울=연합인포맥스) 서영태 기자 = 실존적 위기(Existential Crisis). 자신의 존재 의의를 알지 못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다. 공식적인 심리학·의학 용어는 아니고, 실존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표현이다. 진로를 앞둔 청년기, 성취를 거둔 중년기, 회한을 가진 노년기에 찾아오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외부에서 제기되기도 한다.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산업은 이 물음에 답해왔다. 탈중앙적 속성을 근거로 법정화폐의 대안으로 쓰일 민간화폐라거나, 암호화 기반의 희소성을 이유로 역사상 가장 신뢰받은 화폐인 금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다만 지나친 변동성 때문에 화폐의 본질인 가치의 측정·저장·교환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크립토시장도 자산 증식을 가능케 하는 어엿한 투자처"라는 주장은 '생산적 금융'이라는 국민적 공감대 앞에서 정당성을 잃는다. "망국적 투기는 반드시 잡는다"며 부동산시장에 몰리는 자금을 기업이 성장하는 증시로 돌리려는 게 현 정부다. 한때 증시와 맞먹는 수준인 일평균 약 15조 원의 거래대금(2024년 11월 기준)을 기록했던 국내 크립토시장이 당국과 만나 자신의 존재 의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빗썸 사태가 이러한 물음표를 더욱 키웠다. 암호화폐업계가 내세워온 탈중앙화 금융이나 블록체인 보안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내 2위라는 암호화폐거래소에서 이벤트 당첨금으로 한 사람당 2천 원을 지급하려다 2천 비트코인을 입금했다. 60조 원에 가까운 천문학적 사고금액보다 비트코인 175개만 보유한 빗썸이 무려 62만개를 지급할 수 있었다는 게 황당하다.

암호학을 바탕으로 한 보안기술 '블록체인'을 대변해온 암호화폐거래소가 뒤로는 이 기술을 잘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중이 알게 됐다. "느리고 비싸다"는 이유에서다. 크립토업계 주류인 중앙화거래소(CEX)는 거래기록을 블록체인 기반의 분산원장(온-체인) 대신 허술한 전자장부(오프-체인)에 남긴다. 많은 투자자가 동시에 내는 주문을 실시간으로 감당하기에는 블록(거래기록) 생성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블록체인 네트워크 수수료가 많이 발생해서다.

탈중앙화는커녕 기존의 시스템보다 중앙화·집중화된 게 암호화폐거래소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암호화폐거래소는 거래·중개·보관 기능을 한꺼번에 수행한다. 오히려 전통적인 주식시장에서는 거래소·증권사·예탁결제원이 각각의 기능을 따로 수행한다.

미국 벤더빌트대학교 로스쿨의 예샤 야다브 교수는 '암호화폐시장의 중앙화 패러독스'라는 논문에서 "크립토시장은 태생적으로 탈중앙화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철저히 중앙집중화된 방식으로 운영되는 거래소에 기반을 둔다"고 꼬집었다. 이어 "다수의 암호화폐거래소는 복잡하고 거대한 금융회사로 급격하게 성장했다"고 진단했다.

본질인 블록체인·탈중앙화와 멀어진 암호화폐거래소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어떻게 전통 금융산업과 다른 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번영을 뒷받침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미국 보수논객 오렌 캐스가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도발적인 글을 기고했다. 번영을 뒷받침하지 않고 거래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금융화(Financialization)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금융화는 야바위(grift)"라며 "노동자와 소비자, 경제, 사회 전체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난해한 형태의 도박판 운영일 뿐"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만약 오렌 캐스가 빗썸 사태를 접한다면 이렇게 질문할 거 같다. "암호화폐거래소는 왜 존재하는가?"

ytseo@yna.co.kr

서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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