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윤영숙 기자 =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둘러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점유율 전쟁이 격화하고 있지만, 시장의 시선은 정작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폭발적인 수요에도 불구하고 공급 확대 속도가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구조적 병목'이다.
15일 업계에서는 HBM 공급이 단순히 설비를 늘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 난도와 물리적 공간, 그리고 생태계 연동이라는 삼중 제약에 묶여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 HBM의 역설…늘릴수록 줄어드는 '캐파 잠식'
교보증권이 지난 11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AI 슈퍼사이클의 이면에는 '역 스케일링(Reverse Scaling)'이라는 공급의 함정이 존재한다. HBM은 일반 D램 대비 칩 사이즈가 크고 수율이 낮아, 동일한 용량(Bit)을 생산하는 데 일반 D램보다 3~4배 더 많은 웨이퍼를 잡아먹는다. 이는 HBM 생산 비중을 높일수록 전체 D램 공급 여력은 오히려 급감하는 구조를 만든다.
보고서는 2027년말 주요 메모리 업체의 전체 웨이퍼 캐파 중 HBM이 차지하는 비중이 35%까지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결국 HBM 확대가 전체 메모리 공급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용 D램의 공급을 옥죄는 '공급의 블랙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출처: 교보증권]
◇ 클린룸 공간 부족과 2028년까지의 '롱 쇼티지'
물리적인 생산 공간의 제약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팬데믹 이후 보수적인 투자 기조로 인해 삼성전자의 P5, SK하이닉스의 M15X 등 차세대 팹(Fab) 건설 일정이 당초 계획보다 지연됐다. 이로 인해 최선단 공정을 가동할 클린룸 공간 자체가 부족해진 상태다.
여기에 전력 인프라 확충 지연까지 겹치면서 공급 반응 속도는 과거 사이클보다 현저히 느려졌다. 이러한 구조적 공급 제약은 제품 가격의 강력한 하방 경직성(Sticky Price)을 형성하며, 과거처럼 급등 후 급락하는 사이클과는 다른 양상을 정당화하고 있다.
최근 인텔의 립부탄 최고경영자(CEO)는 칩 부족 현상이 2028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출처: 교보증권]
◇ CoWoS 관문과 HBM4의 '플랫폼 종속'
AI 가속기 공급망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병목은 TSMC의 CoWoS(Chip-on-Wafer-on-Substrate) 등 첨단 패키징이다.
엔비디아 젠슨 황 CEO도 블랙웰(Blackwell) 제품을 "TSMC가 만들 수 있는 만큼 빠르게 판매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생산 과정에서 패키징 용량 제약이 병목으로 작용해왔음을 시사한 바 있다.
HBM은 단품으로 존재할 때가 아니라, GPU와 함께 2.5D 패키징을 거쳐 완제품이 될 때 비로소 가치가 증명되기 때문이다.
특히 HBM4 세대부터는 베이스 다이에 로직 공정이 적용되는 '커스텀 HBM' 비중이 커지면서, 메모리 업체 독자적으로 공급을 결정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엔비디아의 플랫폼 검증(Validation) 일정과 TSMC의 패키징 배정 구조에 완벽히 연동되어야만 출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2분기를 HBM4의 주요 검증 분기로 지목하며, 이 '바늘구멍'을 먼저 통과하는 업체가 사실상 시장 점유율을 독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 '만드는 능력'보다 '풀어내는 능력'의 싸움
결국 HBM4 시대의 승부는 단순히 웨이퍼를 얼마나 많이 투입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역 스케일링에 따른 캐파 잠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제한된 클린룸 공간 내에서 수율을 안정화하며, 엔비디아와 TSMC가 쥔 패키징 슬롯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HBM은 단일 공정의 경쟁이 아니라, 설계·전공정·적층·패키징·플랫폼 검증까지 이어지는 다층 구조 속에서 움직인다. 이 중 하나라도 지연되면 전체 출하 일정이 늦춰지는 구조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HBM은 만드는 산업이 아니라 풀어내는 산업'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생산 능력보다 공급망 안에서 병목을 통과시키는 능력이 점유율을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점유율 경쟁은 숫자 싸움 이전에,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받고 검증을 통과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폭발적인 수요에도 불구하고 공급이 생각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는 배경에는 이 같은 구조적 제약이 자리하고 있다.
ysyoon@yna.co.kr
윤영숙
ysy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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