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민재 기자 = 국제유가가 90달러를 돌파하며 조만간 상징적인 저항선인 '100달러'를 뚫을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렸다. 이에 따라 과거 국제유가가 급등했을 때 불거진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침체) 우려가 다시 부상하는 모습이다.
◇ 기름길 막히면 세 자릿수 국제유가 '시간 문제'
지난 6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전장 대비 9.89달러(12.21%) 폭등해 배럴당 90.90달러에 마감했다. 2023년 9월 28일 이후 최고치다. 브렌트유 선물도 하루 새 8.52% 뛰어 배럴당 92달러대를 기록했다.
시장 분석가들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속 중동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국제유가 100달러 돌파가 임박했다고 보고 있다.
영국 해상무역기구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유조선은 지난 3일(현지시간) 기준 전무(하루 0척)했다. 사실상 '기름길'이 봉쇄된 가운데,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당장 몇 주 안에라도 세 자릿수 가격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골드만삭스는 주중 발간한 보고서에서 "호르무즈 해협 물동량 차질이 현재 수준에서 추가로 약 5주가량 더 회복되지 않고 지속될 경우,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까지 치솟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주초 리서치 업체 번스타인은 해협이 완전히 폐쇄되는 상황을 중단기·장기 등 기간별로 나눠 시나리오를 짰다.
앞으로 1~3개월 정도의 제한적인 공급 차질을 가정할 경우, 2026년에 하루 280만 배럴의 공급 과잉이 발생할 것이라던 기존 전망은 약 180만 배럴의 공급 부족으로 뒤집힌다.
번스타인은 6개월 동안 생산시설이 장기 폐쇄될 경우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제시하며, 이때 하루 560만 배럴의 공급 부족이 발생하고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추정했다.
번스타인은 "6개월 폐쇄 시나리오는 경기 침체 영역에 진입하는 수준"이라며 "세계 경제에 잠재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출처 : 연합인포맥스
◇ 과거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재소환
역사적으로 브렌트유 기준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상회한 건 총 4차례다.
가장 마지막으로 100달러를 넘었던 건 2022년으로, 당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공급 불안이 국제유가 급등을 불렀다.
이보다 앞서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지난 2008년과 아랍의 봄이 있었던 2011년, 이란 핵 문제를 둘러싼 제재가 발동된 2012~2014년에도 국제유가는 역대급 수준으로 뛰었다.
국제유가가 세 자릿수를 기록했을 때 세계 경제는 대체로 물가 상승 압력과 성장 둔화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에 흔들렸다.
선진국도 충격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연구에 따르면 2022년 국제유가 급등은 미국 인플레이션을 충격 직후인 1분기에만 거의 1%포인트 끌어올렸고, 연간 전체로도 0.5%포인트 가까이 높이는 데 기여했다. 유가 급등이 그해 연간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0.13%포인트 낮춘 것으로 추정됐다.
만약 시장 전망대로 국제유가가 또 100달러를 넘게 된다면, 세계 경제는 다시 고물가와 성장 둔화의 시험대에 오를 것이란 관측이다.
인터랙티브 브로커스의 호세 토레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배럴당 100달러 즉, 금요일 브렌트유 가격 기준 12%의 국제유가 상승은 진정한 충격으로 간주된다"며 "국제유가가 그 수준에 도달할 경우, 시장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와 유사한 인플레이션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어 "그런 시나리오에선 미국 물가상승률이 다시 3%까지 치솟을 수 있다"며 "연준의 금리 인하 전망이 무산되고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은 증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까지 오를 경우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를 약 1%포인트 상승시키고 경기 침체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ING는 국제유가 급등에 따라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되는 곳으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큰 아시아 국가들을 지목하며, 특히 취약한 국가로 한국과 태국, 베트남, 대만, 필리핀 등을 꼽았다.
ING는 이들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국제유가가 단 10%만 상승해도 경상수지가 40~60bp 악화할 수 있다"며 "장기간 지속될 경우 일부 국가의 적자는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들은 중동의 주요 석유 및 가스 공급이 차단됨에 따라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로 일시 급등할 경우, 세계 성장률을 0.4%포인트 둔화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그때 전 세계 CPI는 0.7%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유가 상승은 실질 소득과 소비자 지출에 부담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캐나다와 여러 남미 경제권과 같은 산유국들은 수혜를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일부는 낙관론을 이어갔다.
IG의 토니 시카모어 애널리스트는 보고서에서 "급등하는 국제유가에 대한 공포가 시장 밖으로 번지고 있는 듯하지만,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번 달 원유 가격이 거의 20% 올랐음에도 현재 가격은 지난 4년 평균보다 겨우 3.40달러 높은 수준이다"고 밝혔다.
ING 보고서 캡처
◇ 美 유가안정 대책 변수 될까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하는 가운데서도 미국 정부가 예고한 유가 대책이 향후 변수가 될지 주목된다.
시장에선 미국의 유가 안정 대책으로 원유 선물시장 개입과 제재 예외를 통한 추가 공급 확보, 중동 항로 유조선 보호, 전략비축유(SPR) 활용 가능성 등이 거론된다.
미국 재무부는 급등한 에너지 가격을 낮추기 위해 원유 선물시장에 개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 구체적인 안은 공개되지 않았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은 주중 공급 제약을 완화하기 위해 인도 정유업체들에 러시아산 석유를 구매할 수 있는 임시적인 30일간의 제재 면제 조치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동 걸프 항로의 에너지 운송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조선에 해군 호송과 정치적 위험 보험을 제공하는 방안도 내놨다.
전략비축유의 경우 당장 방출하지 않고 향후 활용 여부를 보겠다는 입장이다. 미국 SPR은 현재 약 4억1천500만 배럴로, 대통령이 긴급 방출을 명령할 경우 에너지부는 13일 이내 시장에 원유를 공급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전해진다. 에너지부에 따르면, 하루 100만 배럴씩 공급할 경우 약 1년 반 동안 지속적으로 원유를 시장에 내보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에어포스원(전용기)에서 SPR 활용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격 압력을 조금 낮추기 위해서라면 할 수도 있다"며 "유가는 실제로 오르겠지만 다시 내려갈 것이다, 매우 빠르게 내려갈 것"이라고 답했다.
소시에테제네랄의 벤 호프 원자재 퀀트 리서치 책임자는 미국 정부의 원유 선물시장 개입 가능성과 관련해 "이런 잠재적 조치는 전례 없는 일"이라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미국 정부의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인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금융 수단만으론 주로 실물 수급에 의해 움직이는 에너지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덴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mjlee@yna.co.kr
이민재
m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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