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차·조선 강국 기틀 마련…트럼프 시대 '외교 지렛대'로 재조명
적자 봐도 약속 지킨다는 신뢰 경영 기반해 널리 존경받아
[※편집자 주 = 오는 3월 21일로 한국 경제의 거인으로 불리는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25주기입니다. 정 회장이 일군 기업들은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연합인포맥스는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대한민국에서 아산이 뿌린 '도전의 씨앗'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조명하는 기획 기사 3건을 준비했습니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이재헌 기자 =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 소 한 마리 값을 들고 가출했던 소년은 생전 제대로 쉬는 법이 없었다. 몸을 움직이면서 지혜를 짜내니 노동과 혁신의 연속이었다.
아산(峨山)은 그렇게 단순 부를 축적하는 기업가에 머물지 않고, 국가 산업의 토양을 개척하는 설계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의 유산은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거목이 돼, 글로벌 패권 전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출처: 현대차그룹]
19일 재계에 따르면 아산 정주영 회장의 주요 사업적 변곡점 중 하나로 1940년대 자동차 정비업소인 아도서비스 인수가 꼽힌다. 당시 경성(서울)에서 가장 큰 자동차 수리 공장이었다. 인수할 돈이 없어 그가 경일상회라는 쌀가게 운영에서 쌓은 신용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아산의 뚝심을 시험하려는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아도서비스를 인수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불이 나 공장이 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믿고 채권자들에게 자금을 추가로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부지를 옮겨 공장을 새로 지었고, 밤낮없이 일을 해 남들보다 3배 빠르게 정비를 끝냈다.
이 사업을 키워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운 게 1946년이다. 현재 현대차[005380]의 모태다. 엔진에 빠삭해진 아산은 자동차를 직접 만들기로 구상했다. 그의 '해봤어?' 정신의 시초로 평가된다. 시간이 지나 포니 개발이라는 상징적 사건까지 연결된다. 우리나라가 글로벌 완성차 강국이 되는 씨앗이다.
[출처: 구글 제미니(Gemini) 생성 이미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한구석에는 '현대토건사' 간판을 내걸었다. 해방 직후 미군정 하에서 여기저기 토목공사가 많았는데, 이 역시 아산에게는 돈벌이 이상이었다. 국가 개조에 동참한다는 심정으로 나섰고 반세기가 넘는 현대건설[000720]의 싹을 틔웠다.
사실 아산이 가진 핵심 역량은 노동력이 바탕이었다. 성실히 일감을 쌓아가던 중 낙동강 고령교를 복구할 때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충격이 터졌다. 공사비가 수십 배씩 뛰어 일을 진행할수록 손해였다. 주변의 만류에도 아산은 사재를 털어 공사를 끝냈다. '현대는 적자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킨다'는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현대건설의 경부고속도로 초고속 완공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탄탄대로를 깔아줬다.
현재 HD현대[267250]의 토대가 된 현대중공업은 특히나 무에서 유를 창조한 도전 정신의 정점으로 해석된다. 조선소를 지을 자금이 없던 아산이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을 찾아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권 지폐를 보여준 일화는 '전설'로 회자할 정도다. 세계 최초 동시 공법을 통해 조선소를 지으면서 배를 만든 전무후무한 방식을 택한 부분은 세계사적으로 토픽감이었다.
인천제철을 인수하며 현대제철[004020]까지 거느린 아산은 사실상 국가 제조업의 근간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백화점[069960]과 현대해상[001450], 현대그룹, HDC[012630] 등등 그가 내린 뿌리가 국가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한다는 분석도 있다. 그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 경제사다. 우리나라에서 국민 대다수가 그로 인해 일자리를 얻었고 잘 사는 시민으로 성장했다.
[출처: 현대차그룹]
그가 일궈낸 산업들은 2026년 현재 한국 경제의 외교적 지렛대로 재조명되고 있다. '조선 같은 산업이 몇 개만 더 있었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관세 협상에서 다른 결과를 얻었을 것이라고 관가에서도 입을 모은다. 그래도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로서 큰 역할을 했다. 정 회장이 심은 씨앗이 반세기 만에 국가 안보와 경제 실리를 동시에 챙기는 전략적 자산이 됐다. 아산의 유산은 후대를 통해 뻗어나가며 여전히 확장 중이다.
아산의 업적은 경제적 수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누구보다 앞서 실천했다. 1977년 현대건설 주식 50%를 출연해 설립한 아산사회복지재단은 가장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는 그의 평소 신념을 구체화한 결과물이다. 현재까지도 아산병원을 비롯한 재단 활동은 한국 복지 체계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며 기업가 정신의 모범 사례로 지목된다.
경제인들이 정주영 창업회장의 25주기를 추억을 넘어, 그가 심은 씨앗이 어떻게 한국 경제의 든든한 숲을 이뤘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으로 보는 이유다. 아산의 뿌리에서 돋아난 수많은 가지는 이제 인공지능(AI)과 우주 산업이라는 미지의 영역까지 뻗어 나가며 흔들리는 한국 경제를 굳건히 붙잡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정주영 회장이 구축한 제조업 기반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경제가 겪는 대외 변동성을 버텨내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어떠한 난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불굴의 의지가 가장 값진 유산"이라고 말했다.
[출처: 현대차그룹]
jhlee2@yna.co.kr
이재헌
jhlee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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