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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이면 쓰는 맹탕 밸류업"…고배당 특례 노린 '면피성 공시' 봇물

2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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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새 443건 쏟아졌지만…원론적·추상적 계획에 그쳐

기업 밸류업 (PG)

[연합뉴스 일러스트]

(서울=연합인포맥스) 이규선 기자 = 정부의 기업 지배구조 개혁 드라이브에 발맞춰 상장사들의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가 쏟아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수치 목표나 실행 방안이 빠진 이른바 '맹탕 공시'가 속출하고 있다.

3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최근 한 달 새 443건의 밸류업 공시가 쏟아졌다. 지난해 연간 건수(141건)의 세 배를 훌쩍 넘는다.

조세특례제한법상 고배당기업은 배당소득 분리과세 혜택을 받으려면 주주총회에서 배당을 결의한 다음 날까지 이 계획을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443건이 한 달 새 집중된 이유다. 이날 다수 상장사의 주총이 몰린 점을 고려하면 관련 공시는 내일까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정작 알맹이가 없다는 점이다. 다수 상장사의 공시에서 구체적인 재무 목표나 달성 기한 등 핵심 수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삼영전자공업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목표란에 '시장·고객 다변화', '안정적 수익성 개선'을, 계획란에는 '생산 효율화 및 매출 증대를 위한 설비 증설'이라고 적었다. 어느 회사에나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원론적 문구들이다.

삼영전자공업 기업가치 제고 계획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업종을 불문하고 판에 박힌 문구도 반복됐다.

화장품 기업 삐아는 계획수립란에 "안정적인 수익창출을 통해 목표 이익률 달성"이라고 적었고, 제지회사 신대양제지는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통한 목표이익 창출", IT기업 오파스넷은 "안정적인 수익 기반 확보를 통한 목표 이익 실현"이라고 기재했다. 업종과 사업 내용이 전혀 다른 세 회사가 사실상 동일한 문장을 쓴 셈이다.

신스틸과 일성아이에스, 대원, 삼화전기 등도 '수익성 중심의 경영체계 강화를 통한 이익 창출'이라는 표현을 앞뒤 단어만 조금씩 바꿔 그대로 활용했다.

자본시장의 최전선에 있는 금융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국증권은 목표와 계획으로 '안정적인 수익 창출 기반 강화', '자본 효율성 제고 및 재무 건전성 관리', '투명 경영 및 투자자 소통 확대' 등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법한 문장만 나열했다. 목표 자기자본이익률(ROE)이나 배당성향 등 구체적인 뼈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처럼 알맹이 없는 공시가 무더기로 쏟아진 배경에는 '고배당기업 특례'와 거래소의 '가이드라인 완화'가 자리 잡고 있다.

고배당기업 특례에 따르면 별도의 상세 계획서 없이 주요 내용만 간략히 기재하는 방식도 허용된다. 한국거래소가 지난 1월 기업가치 제고 계획 가이드라인 해설서를 개정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거래소는 수치 목표 설정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기업들의 고충을 반영해 구체적 수치 제시가 어려운 경우 성장 전략 등을 정성적으로 기술할 수 있도록 했다.

자본시장에서는 밸류업의 본래 취지가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자산운용사 본부장은 "3분 만에 작성 가능한 수준의 공시를 하나 내고 세금을 감면받고 있다"라며 "순이익이 감소해서 배당성향이 높아진 회사도 특례를 받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천준범 와이즈포레스트 대표변호사는 "추상적인 공시는 안 하니만 못하다"며 "밸류업 정책의 핵심은 구체성에 있는데 제도의 본래 목적을 흐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제도가 제대로 안착하려면 금융당국과 거래소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국거래소는 '올해에 한정된 한시적 예외'라는 입장이다.

거래소 관계자는 "2월 말 조세특례제한법 시행령 개정안 시행 후 결산과 주총으로 분주한 3월 상장기업들의 준비 기간이 매우 촉박하다는 측면을 고려했다"라며 "올해만 불가피하게 간소화된 공시를 허용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내년부터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현황 진단부터 이행 평가, 소통 등 전체 내용을 담은 완결된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라며 "앞으로 고배당기업이 충실하게 공시를 작성할 수 있도록 컨설팅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거래소가 약식 공시의 참고 사례로 직접 제시한 예시에는 '배당성향 45% 달성', '비영업자산 매각을 통한 배당재원 확보' 등 구체적인 방향성이 담겨 있다. 간소화된 형식 안에서도 최소한의 내용은 갖추도록 했다는 의미다. 이번에 쏟아진 맹탕 공시들은 그 낮아진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 셈이다.

간소화된 기업가치 제고 계획 예시

[한국거래소]

kslee2@yna.co.kr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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