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규선 전병훈 기자 = "리모델링보다 새로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다시 시작할 거라면, 백지에서 시작해보자고요."
증권사 IB와 트레이딩 데스크, 외국계 VC를 거쳐 대형 금융지주 계열 VC의 창립 멤버로 활약했던 베테랑 심사역. 굿모닝증권, 골드만삭스, 소프트뱅크벤처스, 하나벤처스를 거쳐 넥시드(Nexid) 벤처스의 수장으로 홀로서기에 나선 김동환 대표의 이야기다.
기존 운용사로부터 러브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딘가에 합류하는 대신 작은 사무실에서 3명의 멤버와 함께 다시 출발선에 섰다.
최근 강남 테헤란로 인근 넥스드벤처스 사무실에서 연합인포맥스와 만난 김 대표는 "투자하고 뜻대로 안 되면 손절매하는 자산운용사식 접근이 업계에 만연해졌다"며 "VC는 자본만 내어주는 곳이 아니라, 기업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솔루션 프로바이더'가 되어야 한다"고 설립 일성을 밝혔다.
[김동환 넥시드벤처스 대표]
◇"감자칩은 감자칩다워야…유행보다 본질"
김 대표가 스타트업을 만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본질'이다. 시장에 돈이 마르고 정보가 넘쳐나면서 유행을 좇는 창업자들이 늘어난 것에 대한 쓴소리다.
그는 "감자칩을 만든다면 좋은 감자와 기름이라는 본질에 충실해야지, 잠깐 유행한다고 치즈 맛을 입히거나 모양을 무리하게 바꿀 필요는 없다"고 단언했다.
최근 유행하는 타사와의 콜라보레이션이나 단기적인 마케팅 트렌드에 자본과 인력을 낭비하기보다는, 적자를 보더라도 회사가 가야 할 본연의 방향으로 우직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김 대표는 "단순히 '유명한 곳에서 투자받았다'는 타이틀보다, '투자사 덕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 하우스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비슷한 철학을 공유하는 멤버들과 넥시드를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김 대표의 트랙레코드에는 에이피알(APR), 맥스트 등 수십 배의 수익을 안겨준 이른바 시그니처 딜들도 여럿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딜은 따로 있다. 경제·금융 콘텐츠 플랫폼 '어스얼라이언스'다.
2014년 소프트뱅크벤처스 시절 처음 연을 맺은 이 회사는 원래 중국어 회화 교육 스타트업이었다. 하지만 사드(THAAD) 사태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사업은 존폐 위기에 몰렸다. 마지막 남은 자금으로 피벗(사업모델 전환)을 논의했다. 교육 동영상을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 금융 콘텐츠 플랫폼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들이 다 외면할 때 김 대표는 회사의 끈기를 믿고 5차례 후속 투자를 집행했다.
그의 뚝심은 적중했다. 현재 어스얼라이언스는 유명 크리에이터들의 IP를 기반으로 연 매출 600억원을 바라보는 알짜 기업으로 성장해 상장을 앞두고 있다. 김 대표는 이 과정에서 '자체 채널을 만들지 마라', '제작 인프라를 내재화해 크리에이터들의 의존도를 높여라' 등 구체적인 조언을 건넸다.
◇운(運)을 이기는 실력…철저한 '과정 관리'와 '하방 경직성'
벤처 투자는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 불린다. 하지만 김 대표는 운마저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추구한다. 소프트뱅크벤처스와 하나벤처스 시절부터 그는 미팅 기록과 사후 관리 일정을 ERP와 스프레드시트로 기록해 왔다.
그는 피터 드러커의 말을 빌려 "측정되지 않는 것은 평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연히 터진 대박도 수익률엔 기여하지만, 좋은 과정을 통해 좋은 기업을 발굴하는 방법론이 일상화되어 있어야 지속적인 성과가 나온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는 한국 벤처 시장의 특수성도 짚었다. 미국처럼 100배, 200배 대박이 나기 어려운 국내 환경에서는 '하방'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 대표는 "0원이 될 것을 0.5배로 회수하고, 1.5배로 끝날 것을 2배로 만드는 과정 관리가 펀드 수익률을 결정짓는다"며 "전교 1등(알아서 잘 크는 회사)보다 과외가 필요한 중위권 회사들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심사역의 진짜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K-방산·팹리스·AX…1호 펀드가 향하는 곳
1호 펀드 결성을 앞둔 김 대표의 시선은 딥테크와 초격차 분야를 향해 있다. 특히 재도전 기업과 AI 트랜스포메이션(AX)에 주목하고 있다.
넥시드벤처스는 AI 기술 기업을 모회사로 둔 솔트룩스벤처스와 컨소시엄을 꾸려 모태펀드 2026년 1차 정시 출자사업 재도전 분야에 지원해 서류심사를 통과했다. 올해 재도전 분야 출자 예산은 1천200억원으로, 지원한 17곳 중 11곳이 1차 관문을 넘어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최종 GP는 다음 달 제안서 PT를 거쳐 선정된다.
솔트룩스벤처스와의 협업은 김 대표의 투자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사업 전환 과정에서 AI를 활용해 자본 소진을 줄이는 'AX 기반 피벗' 기업을 발굴·육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섹터별로는 우주·방산과 팹리스(반도체 설계)를 유망하게 봤다.
그는 "현재 K-방산은 1980년대 후반 본격적인 수출길이 열리던 한국 자동차 산업과 판박이"라며 "단순 하드웨어를 넘어, 글로벌 각국의 다양한 수요에 맞춰 자주포를 개량하거나 위성 레이더 영상을 분석하는 등 전후방 소프트웨어 스타트업들에게 거대한 시장이 열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주목 분야는 팹리스 생태계다. 김 대표는 "과거 대만의 PC 조립 생태계가 TSMC라는 거인을 낳았듯, 우리나라도 파운드리 발전과 함께 설계 생태계가 싹트고 있다"며 "특히 미국의 빅테크 내에서 반도체 설계를 경험하고 경제적 자유를 이룬 한인 엔지니어들이 대거 창업 시장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대표는 '자력도(自力度)'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강한 것을 갖고 있어야 해외와도 기술을 주고받을 수 있다"며 "한국만의 라이프스타일에서 해외에 팔 만한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겠다"고 했다.
kslee2@yna.co.kr
bhjeon@yna.co.kr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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