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최근 이란전쟁이 촉발한 글로벌 금융시장의 혼란은 투자자들에게 익숙했던 모든 금융 공식과 신뢰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시장이 흔들릴 때 포트폴리오를 지켜줄 최후의 방어선으로 믿었던 안전 자산들이 오히려 위험자산보다 더 가파르게 추락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엔화는 기록적인 약세를 보이고, 금값은 전쟁 중에도 폭락했으며 각국의 국채는 주식과 동반 하락한다. 시장참가자들은 수십 년간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혼돈'의 입구에 서 있다.
과거 위기 시마다 글로벌 자금의 피난처였던 엔화는 이번 국면에서 그 지위를 상실했다. 달러당 160엔에 육박한 엔저의 배경에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자리 잡고 있다. 에너지 자립도가 낮은 일본에 중동발 유가 급등은 통제 불가능한 변수로 작용해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을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확장적 재정정책 역시 엔화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안전통화'라는 입지를 약화한다.
금 역시 마찬가지다.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이라던 금이 전쟁 발발 후 주식시장보다 더 크게 폭락한 현상은 전통적 금융 서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과열된 투기적 거품과 고금리라는 장벽 앞에서 금은 가치저장의 수단이 아니라 중앙은행과 투자자들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내다 파는 '현금 인출기'로 전락했다. 시장이 믿어온 안전자산의 이름은 그 실질을 잃어버렸다.
시장은 이제 단순히 주식만 파는 것이 아니라 채권, 귀금속, 심지어 안전자산이라 불리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셀 에브리싱(Sell Everything)' 장세로 진입했다. 이 광기 어린 매도세 속에서 유일하게 몸집을 불리는 것은 달러화뿐이다. 현금을 제외한 모든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는 이 현상은 시장심리가 마비됐음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달러 강세 시기는 세계 금융시장의 리스크가 극도로 커지는 시기였다. 달러 가치가 오를수록 신흥국의 부채 부담은 가중되고 글로벌 유동성은 얼어붙으며 실물 경제의 숨통은 조여진다. 현재의 달러 강세는 도망칠 곳 없는 투자자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가장 덜 위험한 감옥'에 가깝다.
문제는 각국 정부의 리스크 대응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위기 시엔 중앙은행의 금융완화와 정부의 재정정책으로 돈을 풀어 대응했지만, 각국의 부채 상황을 고려할 때 이제는 그렇게 대응할 여력이 없다는 분석이 많다. 유가와 각종 원자재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도 정부의 손발을 묶는 변수다. 지난 15년간 자산시장을 지탱했던 것은 시장이 망가지면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이제 구원투수는 사라졌고 투자자들은 맨몸으로 강속구를 받아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시장의 하락이 아니라 지난 수 세대 동안 금융시장을 지배해온 패러다임의 붕괴다. 저물가, 글로벌 분업, 중앙은행의 무한 유동성이라는 안락한 환경 속에서 정의됐던 '안전자산'의 개념은 힘을 잃었다. 무엇이 안전한지, 어디로 숨어야 할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다. 전문가들의 예측은 빗나가고, 전통적인 지표들은 서로 충돌하며, '셀 에브리싱'이라는 처절한 구호만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에서 전례 없는 격변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국제경제부 선임기자)
jang73@yna.co.kr
이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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