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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표의 궁변통구] 전세사기,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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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내 돈을 잃었다. 사기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어쨌든 그는 내 돈을 돌려주지 않았고 나는 빌려서 마련한 그 돈을 대신 갚아야 했다. 내 돈을 임대보증금으로 가져가서 반환하지 않은 그 사람의 잘못이지만 은행은 나에게 갚으라고 한다. 나는 돌려받지 못한 돈을 대신 은행에 갚았다. 피해를 봤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피해를 봤는데 다른 사람이 판정해주기 전까지는 피해자가 아니다. 나는 전세사기 피해자다.

2월 임시 국회 내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처리 촉구

(서울=연합뉴스) 신현우 기자 = 5일 국회 정문 앞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가 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2월 임시 국회에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처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6.2.5 nowwego@yna.co.kr

지난 3월 국토교통부는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1천685건을 심의하고 698건을 전세사기 피해자와 전세사기 피해자 등으로 인정했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임대인에 대해 대항력을 갖춰야 하고, 보증금 상한액 이하여야 하며, 다수의 피해가 발생하고, 임대인의 고의적 미반환 등 요건이 있어야 한다. 이런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피해자 등'으로 분류되는데 전입신고를 늦게 해서 대항력을 갖추지 못했거나 다수 피해가 아닌 단독 피해인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단순히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피해가 발생한 경우 국가는 도와주지 않는다. 심지어 사기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다수인지 혼자인지를 따져서 차별한다. 피해자로 인정받는다고 해서 떼인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집에서 쫓겨나는 것 정도를 연장해준다. 국회에서 법이 통과됐다지만 받을 돈의 3분의 1 정도를 돌려주는 수준이다. 그러니 전세사기는 애초에 당하지 않아야 한다.

전세사기를 당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가. 웃기는 소리다.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왜냐. 그런 방법이 있다면 주택도시보증공사(HUG)라는 공공기관이 10조원 가까이 전세보증금을 대신 갚아줬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수백명의 직원과 조직을 거느린 공공기관도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해 조단위 손실을 보는데 일반 국민이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겠나. 전세사기는 임대차시장에서 임대인과 임차인의 정보비대칭이 불러온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다. 개인이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한가롭게 피해자 선별이나 하는 사이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서울대학교 ESG 사회혁신센터에서 제작한 전세사기 백서를 보자.

"(전세사기 피해) 집에 들어올 때 청년 대출이 90%까지 나왔어요. 그걸 듣고 자식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서 얻은 집인데…사회생활만으로도 힘든 아이들한테 고생해서 번 돈을 날렸다고 어떻게 얘기하겠어요. 부끄럽고 미안해서 절대 말 못 하죠…"(2024년 11월, 인천, 자식명의로 전세자금을 대출받은 70대 남성)

"초반에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앞에서는 안타까워하면서도 뒤에서는 바보라고 생각할까 봐…"(2024년 10월, 서울, 외국계 대기업에 다니는 강남 거주 30대 여성)

"전세보증금 받으려고 안 가본 곳이 없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하고 큰 좌절감을 느낀 건 전세사기 피해 구제 센터 상담원의 말이었어요. 전세사기 피해는 어차피 구제받을 방법이 없으니 그냥 빨리 포기하라고…그래서 닥치는 대로 인터뷰하고, 간담회에 참석하면서 제 이야기를 알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뚜렷한 답은 안 나오고 더 답답해지기만 하더라고요…"(2024년 10월, 안산, 어린 딸을 양육하는 외국인 전세사기 피해자 40대 여성)

시민사회단체, 주거권 관련 21대 대선 정책 요구안 발표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주거권네트워크,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등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30일 서울 광화문 월대 앞에서 주거권 관련 21대 대선 정책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4.30 hihong@yna.co.kr

피해자 백서를 정부가 아니라 민간에서 만들었다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여전히 선별적 사후 구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정부가 과연 전세사기 피해를 구제하고 앞으로의 피해를 예방할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몇 차례 칼럼에서 언급했지만 전세사기는 후진적 채권·채무 관계에서 비롯됐다. 임차인에게 채권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만 제대로 보장해줘도 이런 일방적인 피해는 발생하지 않는다. 해결책이 이렇게 간단하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한지 3년을 헤아리는 지금에서도, 국토교통부와 법무부는 10조원의 전세 보증금을 대신 갚은, 그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임대인 정보를 피해예방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도 이재명 정부에서 임대차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근본적인 전세사기 예방 대책을 기대하는 이유가 있다. 대통령의 관심 그리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 때문이다. 정성호 장관은 오랫동안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몸담았다. 간사까지 역임했던 이력이 있기 때문에 주택정책에 밝은 보기 드문 법무부 장관이다. 현 정부의 사법제도 개혁으로 이빨까지 빠져가며 고생하는 정 장관에게 어려운 짐을 하나 더 맡아달라고 요구하는 게 맞는지 고민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피해자 선별이나 하고 있는, 임차인과 임대인의 정보비대칭 해소 등 임대차 시장 정상화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금 국토교통부에는 기댈 구석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피해자 구제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만큼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는 임대차 시장의 정상화에 법무부라도 나서주면 안될까. (산업부장)

spnam@yna.co.kr

남승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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