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굵직한 금융권 현안에 청와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금융위원회의 의사 결정 속도가 확연히 둔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호기롭게 추진했던 사안들이 청와대 보고 직후 뒤바뀌는가 하면, 수정·재보완을 거치느라 동력이 떨어지기 일쑤다. 각 사안마다 청와대 눈치 보느라 '결정장애'가 왔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들어 금융위원회 주도로 금융회사와 진행하는 회의 소집 빈도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많게는 하루에도 수차례 이어지던 회의가 최근에는 별도 소집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올해 초부터 일주일에 두세 차례 이상 회의 참석차 금융위를 찾았는데 최근에는 호출 자체가 거의 없는 수준"이라며 "정책 방향을 정리하는 과정이 이전보다 길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는 실무선에서도 그대로 체감되고 있다. 기존에는 현안별로 금융위와 금융감독원 간 논의를 거쳐 방향이 정리되는 구조였다면 최근에는 금융위 차원의 판단이 늦어지면서 금감원도 후속 조치를 확정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금융권에선 올 들어 청와대의 정책 기조가 달라진 것이 금융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주요 정책 사안마다 청와대 보고 및 최종 판단을 거치는 구조가 되면서 의사결정 과정 자체가 길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위 내부 판단으로 정책을 이끌어가지 못하게 되자 금감원도, 금융회사들도 대기 국면이 길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일을 벌려놓고 매듭이 안 지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실무적으로는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관련 제재 및 과징금 문제는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장기화되는 모습이다.
금융위원회는 시중은행 5곳에 대한 약 1조4천억원 규모 과징금 안건을 전날 정례회의에 상정하지 않은 데 이어 직전 안건소위원회에서도 논의 테이블에 올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관련 논의는 5월 이후로 넘어가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해당 안건은 지난 2월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를 거쳐 넘어온 이후 수차례 검토가 이어졌지만 제재 수위와 후속 파장 등을 둘러싼 부담 속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5월 내 결론 가능성도 불투명하다는 시각이 나온다.
제재 수위와 일정이 확정되지 않으면서 은행들도 충당금 반영과 배상, 소송 대응 전략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 지루하게 이어지자 답답해하는 모습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결론이 나지 않으니 보수적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만큼 의사결정이 늦어지는 구조"라며 "현장에서는 불확실성이 계속 쌓이고 있다"고 한숨 쉬었다.
금융당국이 추진 중인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 작업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금융지주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 발표를 돌연 취소한 것도 청와대가 보완을 요구했기 때문인데, 이후 조율 시간이 계속 길어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청와대의 요구도 반영해야 하고,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하는 금융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말이 돈다.
가계대출 억제책, 디지털자산기본법 2단계 입법 등 주요 이슈도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가면서 이제는 금융위가 상위 판단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행동에 나서는 이상한(?) 모양새가 됐다.
다음 달부터는 주요 일정이 6·3 지방선거와 맞물리면서 정책 판단 과정이 한층 신중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 같은 흐름이 계속 이어질 경우 정책 방향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책 방향이 일정 기간 정리되지 않으면 시장과 실무 모두에서 불확실성이 누적될 수밖에 없다"며 "금융위가 존재감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금융부 윤슬기 기자)
sgyoon@yna.co.kr
윤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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