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2일 신용등급 중심의 금융 시스템이 가진 구조적 문제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김 실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 금융은 왜 이토록 잔인한가: 신용등급이라는 불완전한 과학'이라는 글을 올리며 여유 있는 사람은 싸게, 절박한 사람은 비싸게 돈을 빌리는 금리 시장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는 그간 이재명 대통령이 꾸준히 언급해온 금리 시장의 역설이기도 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찾았던 '디지털 토크 라이브-국민의 목소리, 정책이 되다' 행사에서 15%대인 최저 신용대출자 금리를 두고 "어려운 사람 대출(이자)이 더 비싸다. 너무 잔인하다"며 취약계층에게 신용등급에 따라 대출 금리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금융권의 행태를 비판한 바 있다.
김 실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처음에는 신용의 기본을 모르시는 질문이라 생각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증명된 사람에게 낮은 금리를 주는 것, 그것이 금융의 ABC이자 흔들리지 않는 질서"라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당시 서민금융을 담당했던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도 이 대통령의 지적에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 대통령의 반복된 질문에 금융은 도대체 누구를 지키고 있으며, 무엇을 잣대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있는지 떠올리게 됐다고 회고했다.
30년 넘게 경제관료로 살아오며 신용등급을 금융 시장을 지키는 공고한 시스템으로 만들어온 자신에 대한 반성도 이어졌다.
김 실장은 "나는 이 잔인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작동시키고, 정당화해 온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명백한 공범"이라며 금융위와 함께 신용등급의 존재 이유와 근본부터 다시 의심하는데 착수했다고 전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입증된 사람에게 낮은 금리를 적용하는 것은 금융의 기본 원리이지만, 그 원리가 과연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얘기다.
김 실장은 신용등급 제도에 대해 "복잡한 생애를 숫자로 압착한 결과물"이라며 "불투명한 미래를 수치로 환산하는 시도는 합리적이지만 비극은 그 지점에서 싹튼다"고 썼다.
그는 "신용등급은 철저히 '과거'만 본다"며 "연봉이 같아도 정규직과 자영업자는 신분이 다르고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금융 거래 기록이 없으면 잠재적 낙오자가 된다. 실직, 질병, 이혼 같은 삶의 가혹한 변수들은 모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용등급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지만 이 숫자가 대출의 성패를 가르고 금리의 높낮이를 정한다"며 "이것은 점수가 아니라 구조, 금융이 설계한 보이지 않는 계급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시스템은 '평균의 정답'을 위해 개인의 억울함을 기꺼이 희생시킨다"며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의 사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고 직격했다.
물론 김 실장은 이러한 비판이 신용등급의 무용론을 뜻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그는 "이것은 단순히 금리를 낮춰주자는 동정론이 아니다. 위험을 무시하자는 무책임한 이야기도 아니다"며 "위험은 실재하고 그에 따른 가격표는 필요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위험의 분류가 정말 공정하고 정교한가에 있다"고 썼다.
김 실장은 "역설적이게도 모델이 정교해질수록 시스템은 더 위태로워진다. 숫자를 맹신하게 된 금융은 더 과감하게 돈을 빌려주고, 더 높은 레버리지를 쌓아 올린다"며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 커질수록 거품은 부풀어 오른다"고 내다봤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로 들기도 했다.
김 실장은 "금융은 리스크를 잘게 쪼개고 섞으면 안전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집값이 일제히 고꾸라지는 현실 앞에서 모델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며 "신용을 재료 삼아 탐욕의 탑을 쌓은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어 "미증유의 충격을 겪었으니 근본적인 성찰과 혁신이 뒤따를 줄 알았다"며 "하지만 금융은 오히려 더 엄격하고 폐쇄적인 성을 쌓았다. 서류는 늘었고, 점수는 더 촘촘해졌으며, 문턱은 더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구조의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하는 교묘한 방향 전환"이라며 "문제를 만든 곳과 통제받는 곳이 완전히 달라진 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금융의 양극화는 나아지지 않았다. 성 안의 사람들은 더 공고한 보호를 받았지만, 변방의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올 통로를 찾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며 "왜 개인들만 그 책임을 떠안고 시장 밖으로 밀려나는가"라고 덧붙였다.
jsjeong@yna.co.kr
정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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