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산업가속화법(IAA)' 초안 발표…보조금·조달에 '유럽산' 강제
한-EU FTA로 차별 피했지만…'부품 현지화' 없인 생존 불가
[※편집자주 : 유럽연합(EU)이 역내 제조 역량 강화를 위해 사실상의 '유럽판 IRA'인 산업가속화법(IAA)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관세가 아닌 보조금과 조달 시장의 문턱을 높여 공급망을 강제 재편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우리 기업들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덕분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지만, 소재 현지화와 투자 조건 강화라는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IAA의 주요 내용과 우리 산업계에 미칠 파장을 4건의 기사로 짚어봅니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윤영숙 기자 =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제조업 부흥과 경제안보 주권 확보를 명분으로 보호무역 성격이 강한 산업가속화법(IAA·Industrial Accelerator Act) 초안을 발표했다.
2035년까지 제조업 비중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20%로 끌어올리겠다는 이번 법안은 공공조달과 보조금, 재생에너지 경매 등 공적 지원 전반에 '유럽산(Made in Europe)' 요건을 단계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핵심이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FTA로 '동등 인정' 받았지만…안심은 금물
한국 기업이 가장 우려했던 원산지 차별은 일단 비껴갔다.
IAA 초안은 EU와 자유무역협정(FTA) 또는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을 체결한 국가의 원산지 제품을 EU 원산지와 동등하게 인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한국은 EU와 FTA 체결국이자 GPA 가입국인 만큼 한국산 배터리 부품과 자동차, 철강 제품 등이 EU 공공조달 시장에서 별도 지정 절차 없이 EU 원산지와 동등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
다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EU 집행위가 향후 위임입법을 통해 특정국을 동등 원산지 인정 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안의 본질이 관세 인하가 아니라 공공조달과 보조금 수혜 조건을 바꾸는 데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결국 '보조금을 받으려면 유럽에서 만들라'는 현지 생산 압박이 커질 수밖에 없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자동차·배터리, '현지 조립' 넘어 '소재 현지화' 압박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곳은 자동차와 배터리 산업이다.
IAA는 자동차 부문의 공적 지원 조건으로 EU 역내 조립과 모든 차량 부품(배터리 제외) 가치의 70% 이상 유럽산 요건을 제시했다. 발효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전동 파워트레인과 주요 전자 시스템에도 50% 이상의 원산지 요건이 확대된다.
국내 완성차 업계로서는 FTA 혜택을 유지하더라도 단순 수출 중심 전략만으로는 한계가 커질 수 있다. 유럽 내 생산 거점을 가진 업체는 상대적으로 충격을 줄일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부품 현지화와 유럽 내 공급망 편입 요구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배터리 업계는 기회와 부담이 교차한다. 이번 법안이 사실상 중국산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장치로 해석되는 만큼, EU 내 배터리 셀 생산 역량의 상당 부분(82%)을 차지하는 한국 배터리 기업에는 반사이익이 기대된다.
문제는 갈수록 높아지는 원산지 기준이다. 법안 발효 3년 뒤인 2단계에서는 전기차 구동 배터리에 대해 배터리 셀, 양극 활물질,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을 포함한 5개 주요 부품의 EU 원산지가 요구된다. 이는 양극재 등 핵심 소재의 현지 생산 체계를 갖추지 못할 경우 유럽 완성차 업체 납품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출처: 광장 국제통상연구원 보고서]
◇ 철강 '저탄소 인증' 비상…외투 심사도 변수
철강 산업 역시 새로운 장벽을 마주하게 됐다.
IAA는 2029년 이후 공공조달 및 공공지원 절차에서 철강·철강 기반 제품에 25% 이상의 저탄소 비율 요건을 적용하도록 했다. 기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탄소 배출에 비용을 부과하는 방식이었다면, IAA는 공공조달 시장 진입 요건 자체를 강화하는 규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철강사는 탄소 배출 비용 관리뿐 아니라 저탄소 제품 인증, 탄소 데이터 관리, 유럽 수요처와의 공급망 협력까지 병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투자 심사 강화도 변수다. IAA는 글로벌 제조역량의 40%를 초과하는 제3국 투자자가 배터리, 전기차, 태양광, 핵심원자재 분야에 1억 유로를 초과 투자할 경우 사전 승인 요건을 적용하도록 했다. 승인에는 6개 조건 중 4개 이상을 충족해야 하며, 이 가운데 EU 노동자 50% 이상 고용은 필수 요건이다.
다만 한국 기업 투자는 한-EU FTA 체결국 지위에 따라 해당 조항의 직접 적용 대상에서는 제외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럼에도 EU가 전략산업 투자에 고용, 공급망, 기술 협력 요건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유럽 투자 환경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포스트 FTA' 시대, 공급망 수직계열화가 관건
IAA는 관세 장벽이 낮아졌다고 해서 시장 접근성이 자동으로 보장되던 'FTA 전성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 시장을 지키려면 현지 조립 거점 확보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동차는 부품 현지화, 배터리는 소재·부품 공급망 구축, 철강은 저탄소 생산과 인증 체계 확보가 동시에 요구된다. 소재부터 부품, 완제품까지 이어지는 유럽 내 공급망 수직계열화가 생존의 전제 조건이 되는 셈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보고서에서 "유럽산 요건 강화와 외국인투자 사전심사 도입이 한국 기업에 위기이자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며 "정부와 기업 차원의 대EU 아웃리치 강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광장 국제통상연구원도 "IAA 법안은 아직 EU 집행위원회 초안 단계라 최종 입법까지 시간이 걸릴 전망이며, 심의 과정에서 원산지 요건이나 동등 원산지 인정 대상국 등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국내 업계는 이에 대비해 EU 입법 동향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동등 원산지 인정 배제 가능성을 특히 주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ysyoon@yna.co.kr
윤영숙
ysy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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