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김용범 정책실장이 27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날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 면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6.4.27 superdoo82@yna.co.kr
(서울=연합인포맥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 존 폴슨, 석유 재벌 데이비드 코흐, 부동산 재벌 하워드 밀스테인, 미디어계 황제 루퍼트 머독. 2011년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권의 심각한 탐욕에 맞서 들고 일어난 시위대 '월가를 점령하라'(OWS, Occupy Wall Street)가 지목한 오적(五賊)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 세계 금융시장과 경제는 초토화됐다. 빈부 격차가 심화하면서 부의 양극화는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산했다. 하지만 구제금융을 받은 월가의 금융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흥청망청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월가의 이러한 탐욕과 부도덕성은 결국 사람들의 손에 "99%의 희생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비판 문구가 쓰인 피켓을 쥐게 했다. 시위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전파됐다.
OWS는 2012년 '롤링 주빌리'(Rolling Jubilee)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일종의 빚 탕감 운동으로, 금융사들이 추심시장에 매각하는 장기 연체 채권을 싸게 사들여 빚을 탕감해 주고 채무자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다. 주빌리는 일정한 기간(25년·50년)마다 노예를 해방하거나 죄를 사해주고, 빚을 탕감해 주는 가톨릭 교리에서 나온 말이다. 시간이 흘러 2015년 8월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그대로 차용한 '주빌리 은행'이 설립됐다. 비영리단체로 출범한 주빌리 은행의 초대 은행장은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과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였다.
주빌리 은행의 운영 기조는 간단했다. 무조건 빚을 탕감해주지는 않는다. 은행에서 빌린 돈의 최대 7%만 형편껏 갚게 하는 것이었다. 은행들이 회수가 불가능해 추심시장에 내놓은 부실채권(3개월 이상 연체 채권) 가격은 원금의 최소 3%에서 최대 10% 정도다. 3~5% 정도의 가격으로 채권을 사들이고 7%만 갚게 한 뒤 차액이 발생하면 더 많은 부실채권을 사들여 탕감 규모를 확대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빚 탕감 얘기가 나올 마다 반복되는 '도덕적 해이' 프레임과 비판을 피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공동 은행장에 이름을 올린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은 주빌리 은행 설립 이전부터 지자체 주도의 빚 탕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2014년 성남지역 6개 채권매입추심업체에서 기부받은 10년 이상 장기 연체 부실채권을 소각해 171명의 빚을 탕감해 주면서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시민단체와 종교계 등 사회 연대체 형태의 조직을 통해 기부받고 이를 밑천 삼아 장기 연체 채권을 사들이고 탕감해 주는 방식이었다. 성남시는 밤 9시까지 금융복지상담센터를 열어 악성 채무로 시달리던 채무자들의 상담도 진행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단순히 빚을 없애주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것이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보면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 출발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정상적인 금융 생활도 가능하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이재명 당시 시장은 결과적으로 경제적 성장 가능성을 높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 연휴 기간 쏟아낸 페이스북 글이 은행권을 강타했다. 은행의 회피 전략으로 저신용자들이 끼어들 공간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는 은행들이 포용적 역할을 방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요약된다. 김 실장은 "이 견고한 이중 구조가 우리 금융의 서글픈 민낯"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금융에서 배제된 저신용자들은 성채가 된 은행에 접근도 하지 못하고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리고, 결국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기존 신용 질서의 판을 흔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막대한 공적자금으로 살아난 대한민국 은행들이 '준공공기관'의 역할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결론은 은행들이 신줏단지처럼 애지중지하는 신용평가 체계를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처음은 아니다. 그간 정부가 바뀔 때마다 매번 거론되는 해묵은 숙제이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도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민주당 당 대표 시절은 물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꾸준히 제기해 온 문제다. 이 대통령은 그간 '잔인한 금융', '돈은 마귀'라고 여러 번 반복해 말했는데, 본질적으로 금융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은 이번에 김 실장이 던진 것과 사실 같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종착지는 좀 달라 보인다. 과거와 현재의 이 대통령이 바라보는 것은 과도한 빚 부담에 시달리는 채무자들의 정상적 사회 복귀 쪽에 초점을 뒀다면, 김 실장은 금융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변화와 판 흔들기에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은행의 포용적 역할 확대라는 방향성은 같다. 다만, 대통령과 실무를 총괄해야 할 정책실장의 역할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중·저신용자의 중금리 대출 편의를 확대하기 위한 신용평가 체계 개편 등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또한 금융당국이 대안신용평가체계 구축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거듭 해왔지만 제대로 달성하지 못한 목표로 여전히 남아있다. 인터넷전문은행을 통해 중·저신용자의 중금리 대출을 확대하겠다는 목표도 사실상 이루지 못했다. 어찌 보면 정책의 실패다. 금융당국은 부산하게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본격적인 제도 개선에 나서겠다고 한다. 하지만 획기적인 대안이 나올 것인지에 대해선 솔직히 회의적이다.
은행들은 통상 3개월 연체 채권을 부실채권(NPL)으로 분류하고, 정기적으로 장부에서 털어내는 작업을 한다. 상각이든 매각이든 방식은 다르지만, 미래의 손실을 일단 정리하고 가자는 차원이다. 문제는 은행들이 싼 가격에 털어내는 악성 채권들이 추심업체로 넘어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끔찍하기 때문이다. 추심업체는 원금의 10% 이내인 채권을 사들여 이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격에 회수만 한다면 이득이 난다. 온갖 일들을 해 받아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은행에서 '버림받은' 채무자들은 악몽이 시작된다. 금융에서 배제되는 것은 물론 인생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은행이 만들어낸 '빈 공간'은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은행들은 부실채권을 털어내고 대손비용만 치르면 아무런 문제는 없다. 물론 회계상 손실이 발생하고 이익이 줄어드는 문제가 있지만, 적극적으로 채무 조정에 나설 유인은 없다. 특히 자본 비율 규제 차원에서라도 빨리 털어버리는 게 낫다. 위험가중치가 높은 부실채권을 많이 보유하게 될 경우 위험가중자산(RWA)에 악영향을 준다. RWA가 커지면 보통주자본비율(CET1)은 하락한다. 결국 은행 입장에서는 자본 적립 부담만 커진다. 건전성과 신용등급에 영향을 주게 되는 부실채권을 안고 갈 이유가 없다. 속된 말로 '자동 정리'를 할 수밖에 없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건전성 규제를 약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은행들이 부실채권을 기계적으로 매각하는 것을 자제하고, 자체적으로 채무 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인센티브 유인을 주는 방안이 필요하다.
공적 배드뱅크 체계도 획기적으로 손 볼 필요가 있다. 장기 연체 채권 문제를 해결하고 채무 조정을 하는 공적 기관으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채무 조정보다는 채권 회수에만 초점을 둔 경직적 운영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캠코는 은행 등에서 부실채권을 매수한 뒤 막대한 수수료를 지급하면서까지 민간 추심회사에 위탁하는데 경우에 따라 추심업체의 막무가내 불법 추심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어찌 보면 공공기관도 포용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준공공기관'인 은행들은 오죽할까. 이 또한 정책의 실패다. 이 대통령의 말처럼 악성 연체 채권에 시달리는 채무자라도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복귀가 가능하도록 하는 금융시스템이 되도록 손질이 필요하다. 복지 차원이 아닌 경제성장을 위한 아군을 만들어낼 선순환의 방향이어야 한다. 그래야 은행도 잠시 이탈했다 돌아오는 잠재 고객을 다시 맞이할 수 있다. 금융 접근성 차원에서만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선임기자 /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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