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김성민·홍기원]
(서울=연합인포맥스) 그간 반도체 시장은 일종의 공식처럼 움직여왔다. 반도체 수요를 일으킬 이벤트가 발생하면 메모리 등 반도체 가격은 급하게 올랐다. 이는 반도체 제조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다. 물들어 올 때 노를 젓는다는 심정으로 생산시설을 대규모로 늘려왔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투입됐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다들 똑같았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증설에 증설로 대응했다. 결과는 뻔하다. 공급 우위 시장으로 재편되면서 가격은 내려간다. 기업들의 이익은 줄어들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당연히 투자할 자금은 소진됐고, 증설은 꿈도 꾸지 못한다. 공급은 다시 줄어든다. 일정한 휴지기를 거쳐 가격은 회복세를 보인다. 돈을 다시 벌기 시작한 반도체 제조사들은 수요에 맞춰 공급을 늘리기 위한 증설에 다시 나선다. 호황과 불황이 거듭되는 사이클이 수년을 주기로 반복됐다.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을 두 개나 가진 우리나라에 이렇듯 공식처럼 움직이는 반도체 사이클은 축복이기도, 고통이기도 했다. 반도체 사이클에 따라 거시 경제 예측과 대응은 쉽지 않다.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워낙 크다 보니 정책 당국은 반도체 시장만 쳐다볼 수밖에 없다. 3년 전 자료이긴 하지만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분석은 반도체가 우리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도체 가격이 20% 하락할 때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0.15%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 수출 물량이 10% 감소하는 동시에 가격까지 20% 내리면 GDP 감소분은 0.93%에 달했다. 반도체 수출 물량이 10% 줄어들면 민간 소비는 0.22%, 고정 투자는 0.45% 감소했다. 수출 물량 감소에 가격까지 떨어진다면 민간 소비 감소분은 0.38%로 더 커진다. 그 반대의 경우는 우리 경제에 축복으로 다가오게 된다.
올해 1분기 우리나라의 총수출액은 1년 전보다 37.8% 늘어난 2천199억달러였다. 이 중 반도체 수출액은 무려 139% 급증한 785억달러였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35.7%에 달했다. 수출 품목 셋 중 하나가 반도체였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AI 투자 확대에 따라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폭발하면서 D램과 낸드플래시를 사려는 수요도 치솟은 데 따른 결과다. 1분기에만 D램과 낸드 수출액은 무려 249.1%와 377.5% 급증했다. 1분기 실질 GDP 성장률이 예상치를 크게 웃도는 1.7%에 달한 것도 사실 반도체 효과 때문이다. 모든 수치가 완연한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가리킨다. 분명한 축복의 시대다. 국가의 부는 늘어나고 있고 반도체발 광풍이 이끈 자산효과는 더욱 확산하고 있다. 중동 전쟁이 초래한 오일쇼크마저 반도체가 눌러버리면서 거시 경제의 부담까지 완화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반도체 쏠림을 경계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사이클이 축소 국면으로 들어서게 됐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슈퍼 사이클이 이전과 같은 것인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몇 년 단위의 주기성에 기반해 현재의 반도체 시장이 움직이는 것인지를 봐야 한다. 내가 볼 땐 아니다. 과거 반도체 시장, 특히 메모리 시장은 PC와 모바일 시장의 부침과 주기성에 철저히 연동돼 움직여 온 측면이 강하다. 여기에 더해 데이터센터 구축이 가세하면서 시장 수요가 확장돼 왔다.
그런데 현재의 인공지능(AI) 기반 반도체 수요는 분명히 다르다. AI의 영역은 단순 추론 분야에서 머물지 않고 피지컬과 로보틱스 등 제조업 분야까지 침투하고 있다. 이는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해 필요했던 반도체 수요를 더 확장하고 있다. 산업구조의 재편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탈바꿈을 AI가 이끌고 있다. 이러한 영역 파괴는 사실 어디로까지 확장할지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상상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스마트폰과 PC가 나올 때마다 업그레이드된 메모리 수요가 늘어나던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예상치도 못했던 분야에서의 수요가 창출되고 있다.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추동하고, 석유가 전 세계 제조업의 핵심 축으로 작용했던 것 못지않은 상황 변화다. AI 기반으로 산업구조가 확장하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반도체 공급망은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 과거의 사이클 개념으로 현재의 반도체 시장을 바라봐선 안 된다.
반도체 사이클의 주기성이 깨지는 상황은 분명히 우리에겐 축복이다.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위상을 올리는 것은 물론 반도체 기술 패권국으로서 자리매김할 기회이기도 하다. 반도체가 안겨줄 국부의 확장은 거시경제 운용은 물론 국가 재정정책에도 큰 변화를 줄 것이다. 특히 반도체 호황이 불을 당긴 이익 확장은 세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할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법인세만 100조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법인세뿐 아니라 소득세와 증권거래세 등 자산세 증가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올해 '벚꽃 추경'을 편성하면서 예상한 올해 추가 세수는 25조2천억원이었다. 이에 따라 올해 세수 전망치는 본예산 기준 390조2천억원에서 415조4천억원으로 늘었다. 초과 세수 전망치 25조2천억원 중 법인세 분은 14조8천억원이었다. 그런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익 전망치에 기반한 법인세 예상분을 고려하면 이보다 훨씬 확대될 여지가 있다.
그런데 AI 투자와 반도체 시장 전망 등을 고려하면 현재의 슈퍼 호황은 최소 2028년까지는 이어질 것이란 게 증권가의 예상이다. 경기 변동성을 감안해 세입 예산을 매우 보수적으로 추산하는 정부의 입장을 고려하면 초과 세수 상황이 반복될 여지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남는 세금을 어디에 써야 할 것인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도 해 볼 필요가 있다. 초과 세수를 단지 추경 재원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예비적 예산으로 묶어두고 비상시에 매우 유연하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그간 추경 재원으로 최우선으로 고려돼 온 것은 세계잉여금이다. 세계잉여금은 1년간 징수한 세금을 쓰고 남은 돈을 말한다. 그런데 세계잉여금은 사용 용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어 사실 경기 대응 또는 취약층 지원 등의 재정 용도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초과 세수로 남은 세계잉여금은 3조2천억원에 달했지만, 실제 추경 재원으로 쓸 수 있는 자금은 1천억원에 불과했다.
일반회계와 특별회계 잉여금 처리 방침에 따라 초과 세수를 쓰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너무나도 경직적이다. 적재적소에 쓰여야 할 세금이 묶여 버리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이를 새롭게 조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미국 50개 주(州)에서 도입한 '불황대비기금'(Rainy Day Funds)을 검토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불황대비기금은 경기 호황기에 여유 재원을 구축해 놓은 뒤 경기가 나빠지면 재정으로 활용하는 제도다. 1982년 미국 12개 주에서 시작했고 현재는 50개 모든 주에서 법제화를 통해 실시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초과 세수 가능성이 큰 상황이지만, 여전히 정부의 재정이 필요한 곳들은 많다. 본예산에서 모두 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대해선 재정 지출 유연성을 확보할 수단 하나쯤은 필요하다. 기금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자산운용과 연계한다면 재정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규모를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선임기자 / 부국장)
pisces73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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