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직전, 전 세계 경제학계를 달군 화두는 이른바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이었다. 이는 아시아 국가들이 싼값에 물건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벌어들인 달러로 다시 미국 국채를 사주는 구조다. 미국은 저금리 속에서 과소비를 즐기고 아시아는 고성장을 구가하는 일종의 '경제적 효율성'에 기반한 공생 체제였다. 그러나 이 달콤한 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공생이 사실은 지속 불가능한 거대한 '부채의 탑'을 쌓고 있었다는 사실이 위기를 통해 증명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 가량 지난 2026년 현재, 글로벌 불균형이 세계 경제계의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올해 3월 유럽의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와 브뤼겔 연구소의 경제학자들이 불균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제4차 파리 보고서'를 G7에 전달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이 주제를 거듭 경고하고 나섰다.
다시 돌아온 불균형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질적 변화를 보인다. 과거에는 시장의 효율적 분업이 만든 부작용이었다면, 지금은 각국의 내부 모순을 감추기 위한 정치적 선택과 생존 전략이 충돌하는 양상이다.
현재의 불균형을 주도하는 한 축인 중국은 부동산 거품 붕괴와 내수 침체를 만회하기 위해 자국 보조금으로 생산한 전기차와 첨단 제품을 전 세계 시장에 싼 값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는 상대국의 산업 생태계를 초토화하는 '디플레이션 수출'이자 체제 유지를 위한 처절한 버티기다.
이 파고를 정면으로 맞닥뜨린 유럽은 즉각 반발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말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중국의 무역 흑자를 두고 "참을 수 없는(Unbearable) 불균형"이라며 이례적인 강도로 비판했다. 유럽연합(EU)은 중국산 전기차에 전례 없는 고율의 상계관세를 부과하는 등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또 다른 축인 미국은 방만한 부채 문제로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다. 표심을 잡기 위한 미국의 대규모 재정 적자는 고금리와 강달러를 유발했고, 이는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려 무역 적자를 고착화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미국은 이 모순의 책임을 중국의 '과잉 생산' 탓으로 돌리며 징벌적 관세 장벽을 세우고 있다. 과거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주던 글로벌 가치사슬이 이제는 상대의 성장이 나의 파괴를 의미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된 셈이다.
불균형을 범죄시하는 이 위험한 서사에 한국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은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첨단 기술 분야에서 막대한 무역 흑자를 거두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이 제조업 일자리를 빼앗긴다며 '경상수지 흑자국' 전체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마당에 우리의 반도체 흑자가 그들의 표적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중산층을 복원하고 산업 주권을 지키기 위해 보호무역의 몽둥이를 휘두르는 시대가 됐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언제든 긴장의 끈을 풀지 말아야 한다. 이제 세계는 경제학 교과서가 아닌 지정학적 생존 교본에 의해 움직인다. 각국이 뼈를 깎는 내부 구조 개혁 대신 손쉬운 '관세 전쟁'과 '공급망 무기화'를 택하면서 글로벌 경제는 필연적으로 파편화의 길을 걷고 있다. '공생'의 시대가 가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왔음을 직시해야 한다. (편집국 선임기자)
jang73@yna.co.kr
이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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