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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권 칼럼] 석유를 이긴 반도체…실질 GDI에 주목한 이유

2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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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 하는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서울=연합뉴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28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5.28 [사진공동취재단] photo@yna.co.kr

(서울=연합인포맥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의 금융통화위원회 데뷔전 코멘트는 명확했다.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다". 논거도 복잡하지 않았다. 물가와 성장, 환율, 부동산 등 모든 측면이 금리 인상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기준금리가 위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군더더기 없이 설명했다. 심플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견을 달기 어려울 정도였다. 실제 데이터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방향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시장 우려에도 단호했다. "시장은 균형을 찾아야 한다". 채권시장 플레이어들 입장에선 섭섭한 언급일 수도 있다. 앞으로 냉정한 혹한기를 버텨내야 하는데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변화된 시장 환경에 맞춰서 생존해야만 한다. 통화정책이 채권시장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장 동작 원리와 흐름이 불합리할 때는 한은이나 정부는 언제든 개입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나타난 데이터만 놓고 보면 어르고 달래기 위한 프리미엄을 더 줘야 할 상황은 아니다. 각자도생을 위한 자체적인 자산 조정이 우선이다.

금통위 직후 열린 신 총재의 기자회견에서 눈에 띄는 단어 두 개가 귀에 들어왔다. 실질 국내총소득(GDI)과 낙수효과였다. 그간 통화정책 설명 과정에서 잘 언급되지 않았던 단어들이다. 그런데 신 총재가 언급한 이 두 단어는 앞으로 한은의 통화정책과 정부의 재정정책이 어느 방향을 향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시그널이었다. 한은과 정부의 정책조합(policy mix)이 매우 유기적으로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작동할 것이란 점도 시사한 것이라 판단된다.

한은이 그간 매 분기 성장 흐름이 어떠했는지를 발표하면서 내놓는 주된 데이터는 실질 국내총생산(GDP)이었다. 실질 GDP는 국가의 성장세를 가늠하는 글로벌 표준 지표이기도 하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실질 GDP(속보치)는 전기 대비 1.7%, 전년동기대비 3.6%였다. 말 그대로 서프라이즈였다. 한은도 놀랐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더 눈길을 끈 것은 실질 GDI가 전기 대비 7.5%, 전년동기대비 12.3% 급증한 것이었다. '서프라이즈 GDP'에만 주목도가 높았지만, 실질 GDI가 1년 전과 비교해 12% 이상 급증했다는 것은 더 놀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 주목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아주 단순화하면 실질 GDP는 한 나라의 경제 성적표, 실질 GDI는 국민의 실질적인 체감경기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볼 수 있다. 사실 실질 GDP가 좋아졌다고 해서 국민들의 삶도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실질 GDP는 말 그대로 단위 기간에 얼마만큼을 생산해 냈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 그런데 실질 GDI는 실질 GDP에 교역조건 변화에 따른 실질적인 무역 손실 규모를 반영해 산출한다.

실질 GDP를 통해서는 실질 구매력을 보여주는 체감경기를 반영하기 어렵다. 교역(수출·수입)을 통한 가격 비율이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물건을 만들어 어떤 가격에 팔리고, 사 왔는지를 고려해야 실질 구매력 상황도 파악할 수 있다. 그에 따른 체감경기 상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주력 수입품목은 석유(원유)이고, 주력 수출 품목은 반도체다. 석유 가격이 상승하면 교역조건은 악화하고 반도체를 많이 팔면 교역조건은 개선된다.

결국 교역조건의 악화, 개선이 어느 쪽에 더 치우쳐져 있느냐에 따라 실질 구매력에 영향을 주게 되는 셈이다. 이를 잘 판단할 수 있는 지표가 실질 GDI다. 그간 우리나라는 유가의 큰 변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상 교역조건이 악화되는 추세를 보여왔다. 그렇다보니 실질 GDI는 실질 GDP를 밑도는 경향성이 컸다. 구매력 약화에 따른 내수 부진이 장기화한 탓이기도 했다. 내수 부진은 결국 소비 둔화와 연결되는 데 민간 소비와 기업투자 정부지출, 순 수출의 함수로 이어지는 GDP의 둔화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지속해 둔화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기도 하다.

올해 1분기에 나타난 실질 GDI 증가세는 우리 경제의 고질적인 구조적 문제가 드디어 해소되는 것 아니냐는 시그널로 해석되고 있다. 중동전쟁으로 국제유가가 큰 폭으로 오르고 있는 점은 우리에겐 큰 악재다. 그런데도 무역 손실 규모를 고려한 실질 GDI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이를 덮고도 남을 정도의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는 것이다. 바로 반도체 호황이다. 비싼 가격에 석유를 사 올 수밖에 없지만, 고공행진 하는 반도체 가격이 이를 완전하게 덮어버렸다. 늘 교역조건을 악화시켜온 석유가 수요가 폭발한 반도체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신현송 총재는 금통위 기자회견에서 "(반도체 가격) 추이로 봐선 계속 높게 유지할 수 있고 반도체가 단시간에 생산을 늘릴 수 있는 품목이 아니어서 (호조 상황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효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지난 1일 한은 별관에서 열린 'BOK 국제콘퍼런스' 정책 대담에서 "보통 유가가 상승하면 교역 조건이 불리해져 GDI 성장세가 GDP보다 둔화하는데, 이번에는 에너지 가격 상승분을 반도체 수출이 상쇄했다"라고도 했다. 인공지능(AI)발 반도체 초호황기가 가격 고공행진 속에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교역조건의 개선 상황이 이어지면서 실질 GDI의 증가 흐름도 계속될 수 있다는 전망과 다름없다.

실질 GDP와 GDI의 동반 고공행진은 결국 금리 인상의 강력한 명분이다. 다만, 신 총재가 실질 GDI를 거듭해 언급한 것은 금리 인상을 위한 보다 명확한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촉발된 인플레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이 자칫 성장을 훼손시켜 디스플레이션 상황으로 내몰 수도 있다. 또 취약계층에 대한 금융 부담을 떠안길 수도 있다. 하지만, 실질 GDP는 물론 GDI 수치로 보면 매파적 통화정책을 펼치더라도 부담을 경감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소득과 자산 불평등 및 양극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지표상 체감경기는 우상향하고 있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금리 인상 시기를 실기해선 안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산출 갭(실질 GDP와 잠재 GDP의 차이)이 내년에는 플러스로 전환할 수 있다고 예상한 것 또한 같은 논리다.

그러면서도 신 총재가 또 내세운 것은 초과 세수에 따른 낙수효과다. 그는 반도체 호황에 따른 낙수효과는 분명히 있다고 했다. 중앙은행 총재 입에서 나오기 쉽지 않은 말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재정을 통해 국민 전체에 돌아가는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 또한 이례적인 언급이다. 반도체발 초과 세수 활용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정부가 확장적 재정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사실상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 셈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보여온 한은의 입장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다.

인플레를 잡고 금융안정을 위해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들을 정부가 재정정책으로 보완해 줄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도체 호황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라 성장세가 예상보다 더 커질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내뱉기 어려운 말이다. 신 총재는 두 자릿수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명목 GDP를 고려하면 국가·가계부채 비율에도 상당히 유익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간 정부가 보여온 입장과도 궤를 같이한다. 분모(명목 GDP)를 키우면 분자(부채)가 늘더라도 총부채 비율이 더 낮아지거나 유지될 수 있다는 얘기다. 통화정책은 매파적이되 속도는 조절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은 재정으로 메우면서 전체적인 경제 흐름은 우상향 방향으로 이끌겠단 의미가 아닌가 싶다.

(선임기자 / 부국장)

pisces73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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