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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지금] 전 세계가 원화를 던지고 있다

26.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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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연합인포맥스) "원화 팔아서 케냐 주식에 투자하는 놈 누구냐. 나와라."

작년 11월 달러-원 환율이 1,500원에 육박할 때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는 이른바 '쿨드립'을 남겼다. 환율 급등의 원인으로 "그저 해외 주식 투자가 많아져서"라며 "젊은 분들이 해외 주식 투자를 많이 하길래 왜 하냐고 물어보니 '쿨하잖아요'라고 하더라. 유행처럼 막 커지는 측면이 걱정된다"는 게 이 전 총재의 판단이었다.

이 발언은 즉각 청년층의 공분을 사면서 수많은 인터넷 밈이 쏟아졌다. 특히 청년층이 어이없어했던 점은 이 전 총재가 원화 약세를 미국 달러에만 국한하고 해외 주식 투자를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한 점이다.

하지만 원화가 미국 달러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통화를 대상으로 약세라는 점은 구글에서 손가락만 두들겨봐도 안다. "케냐 주식에 투자한 건 누구냐" 같은 밈이 소셜미디어에 나온 것은 그의 상황 인식을 비꼬는 차원이었다.

이 전 총재의 논리대로라면 케냐 실링화 대비 원화 환율이 당시 급등한 것은 누군가 원화를 매몰차게 팔아 케냐 주식을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핵심적인 이유가 아닐 것이라는 점은 어림짐작으로도 알 수 있다.

뉴욕증권거래소

[연합뉴스 자료사진]

'케냐 밈'은 웃자고 하는 소리였지만 원화 가치가 전방위적으로 약해지고 있다는 점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코스피가 5% 넘게 급락하던 지난 5일 원화 가치는 전 세계 모든 통화 대비 가파르게 하락했다. 거의 유일하게 아르헨티나 페소 정도만 보합에 머물렀을 뿐이다.

코스피가 폭락한 6월 5일 원화 대비 환율 현황

[출처 : 인베스팅닷컴]

시계열을 넓히면 충격은 더 크다.

연합인포맥스의 통화별 등락률 비교 화면(화면번호 2116)에 따르면 이 전 총재의 '쿨드립'이 나온 작년 11월 27일 이후 전날까지 약 6개월간 단말기에서 확인 가능한 33개국 통화 중 원화 대비 약세를 보인 통화는 인도 루피와 인도네시아 루피아, 터키 리라까지 3개에 불과하다.

나머지 통화는 모두 강세였으며 호주 달러와 노르웨이 크로네, 헝가리 포린트, 멕시코 페소는 10% 이상 가치가 뛰었다. 전쟁 통인 러시아 루블조차 원화 대비 11.42% 급등했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작년 6월 4일부터 따지면 인도네시아 루피아와 인도 루피마저 원화 대비 강세로 돌아선다. 연간 32%의 인플레이션 폭등을 겪는 터키를 제외하면 원화보다 저렴해진 통화는 이 가운데 한 곳도 없었다. 여기에 케냐 실링까지 포함하면 33개국으로 늘어난다. 말 그대로 모두가 원화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이재명 정부 1년간 각국 통화 대비 원화 가치 추이

[출처 : 연합인포맥스]

원화 가치가 이토록 전방위적으로 평가절하되는 배경에 대해 시장에서도 뚜렷한 답을 내놓진 못하고 있다.

달러-원 환율의 약세 요인에 대해선 ▲이란 전쟁 여파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주식 투매 ▲마이너스 실질금리와 에너지 수급 불균형의 이중고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설득력 있게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달러-원 환율의 강세가 여러 이종통화까지 전이되는 배경, 혹은 원화가 개별적으로 각 이종통화 대비 약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애를 먹는 분위기다.

글로벌 기관 투자자들의 알고리즘 매매가 원화 약세의 악순환을 촉발했다는 분석은 그중 설득력이 있는 분석이다.

자산운용사와 투자은행, 특히 헤지펀드들은 통상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가 특정 임계치 이상으로 급격히 약세를 보일 때 이를 신호로 포착, 다른 이종통화 대비로도 원화를 자동으로 매도하게끔 알고리즘을 설정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가령 투자은행들은 다수의 통화를 묶어 동시에 거래할 수 있는 '바스켓 알고리즘' 서비스를 고객인 기관투자자에 제공한다. 장 중 원화가 기준점인 달러 대비 전날 종가보다 1% 이상 급락하면 포트폴리오 내의 원화 자산을 다른 신흥국 및 선진국 통화 바스켓으로 즉각 매도하도록 알고리즘을 짜두는 식이다.

이때 조건이 맞춰지면 알고리즘에 따라 기계적으로 원화가 매도되고 유로나 엔, 루피 등 여러 이종 통화가 동시에 매수되는 주문을 낼 수 있다. 이럴 경우 달러-원 환율 급변만으로 이종통화 대비 원화 가치도 변동하게 된다.

시스템적 달러-베타 분류 전략에 따라 달러 대비 고베타로 분류되는 원화를 기계적으로 매도하고 바스켓 알고리즘이 같이 작동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원화는 글로벌 시장 위험이 커질 때 가장 먼저 매도되는 '고베타 통화군'으로 분류된다.

원화는 통상 반도체 사이클이 상승기에 있고 글로벌 증시에서 위험 선호가 강할 때 달러 대비 가치가 강해지는 고베타 통화다. 하지만 인공지능(AI) 열기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함에도 이란 전쟁에 따른 에너지 수급 불안정과 미국 대비 낮은 금리로 고베타 통화의 약점이 더 부각됐다는 관측이다.

월가의 영국계 은행에 근무하는 외환 딜러는 "반도체 수요 급증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란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수급이 불안정해지고 여전히 금리가 낮아 다른 이종통화 대비 매력도가 낮다는 점이 부각된 것 같다"며 "반도체를 제외하면 한국에 우호적인 여건이 별로 없는 만큼 고베타 통화인 원화 자산을 기계적으로 축소하도록 알고리즘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진정호 뉴욕특파원)

jhjin@yna.co.kr

진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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