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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과기정통부 차관의 지갑에 든 혈서

2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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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와 손잡더라도 피지컬 AI 기술 국산화 중요

류제명 과기정통부 2차관이 보여 준 TDX 연구진 서약서

[촬영: 서영태 기자]

(서울=연합인포맥스) ○…"40년 전 TDX(시분할 전자교환기) 연구자들이 쓴 혈서를 코팅해서 지갑에 가지고 다닌다. 40년 전 선배들이 하신 일을 지금 우리가 못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지난 9일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열린 피지컬 AI 선도기술개발 사업 착수보고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류제명 2차관이 외투에서 지갑을 꺼내고는 낡은 서약서를 들어 보였다.

"연구원 일동은 최첨단기술인 시분할 전자교환기의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만약 실패할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한다. 1982.4.6."

TDX 혈서라고 불리는 이 서약서는 40여년 전 연구자들의 지장이 찍힌 종이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연구자들의 비장한 각오가 담겼다. 당시 정부 주도로 연구자들이 야전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TDX를 국산화했고, 우리나라의 통신 주권을 지키면서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2차관이 이 혈서를 다시 꺼내 든 이유는 AI 주권 때문으로 해석됐다. 한국과 피지컬 AI 분야에서 밀착하고자 3박 4일간 방한했던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출국한 날 열린 이 행사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LG전자[066570]·서울대·카이스트 등은 언젠가 엔비디아의 월드 모델인 코스모스와 경쟁하게 될 피지컬 AI 원천기술을 국산화하는 전략을 심층 논의했다.

차세대 산업혁명의 엔진인 AI 팩토리를 한국에서 구축하기로 한 젠슨 황은 이번 방한에서 국내 대기업들과 연쇄 회동했다. AI 팩토리는 데이터를 원료로 지능을 생산하는 AI 인프라를 뜻한다. 클라우드·반도체·냉각 등 다양한 기업과의 팀플레이가 필수적이다.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000660]와 AI 팩토리용 메모리 반도체를 공동개발하기로 했고, LG전자에는 냉각 설루션을 요청했다. 네이버[035420]는 데이터센터·클라우드 운영 경험을 갖췄다.

엔비디아가 한국을 낙점한 이유는 제조 데이터로 보인다. 한국은 피지컬 AI, 그중에서도 제조 AI에서 가장 앞서나갈 잠재력을 가졌다. 한국어 데이터가 영어 데이터보다 적다는 한계 등으로 우리나라는 대규모언어모델(LLM)에서 경쟁하는 데 제약을 겪었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이 쌓은 제조 데이터는 우리나라에 풍부한 자산이다. 여기에 더해 ICT 역량도 뛰어나다. "뛰어난 전자산업·기계공학·제조업·클라우드·AI 역량까지 동시에 갖춘 나라는 매우 드물다"며 젠슨 황이 한국을 피지컬 AI 시대의 최적 파트너로 치켜세운 이유다. 한국 입장에서도 AI용 가속기 시장에서 압도적 지위를 가진 엔비디아는 최적의 파트너다.

훗날 우리나라 기업과 엔비디아가 피지컬 AI를 제대로 구현해낸다면 새로운 먹거리와 제조업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특히 제조업 경쟁력 측면에서 피지컬 AI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중국·일본·대만 등 다른 동아시아 제조업 경쟁국도 AI로 효율성·생산성을 높인 공장을 갖추는 데 힘쓰고 있다. 우리가 이 분야에서 앞서나가지 못한다면 뒤처질 뿐이다. 젠슨 황의 방한이 반가운 이유다.

문제는 엔비디아가 어디까지나 외국 기업이라는 점이다. 젠슨 황은 2006년부터 자사 그래픽처리장치(GPU)용 컴퓨팅 플랫폼인 쿠다(CUDA)를 밀어왔다. AI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생태계에서도 독보적인 기업으로 나가려는 전략이다. 현재 엔비디아 소프트웨어 생태계는 코스모스·아이작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이뤄졌다. 이번에 엔비디아와 손잡은 우리 기업들은 향후 이 플랫폼들을 통해 가상현실 구현과 로봇 훈련 등을 수행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기업이 엔비디아에 지나치게 종속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많은 국민들이 카메라를 들고 젠슨 황에게 열광했으나, 계산기도 두드려보면서 국익 극대화를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이날 만난 과기정통부의 다른 관계자는 투트랙 전략을 제안했다. 우리나라 기업이 피지컬 AI 분야에서 엔비디아와 손을 잡으면서도 원천기술 국산화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엔비디아와 협력하는 과정에서 노하우를 배우고, 이를 원천기술 국산화에 활용하면 엔비디아를 추격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그는 "미국의 모든 통신장비회사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80년대 초반, 우리나라가 TDX를 개발하겠다고 했을 때 미국 회사들이 다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투자로 목표를 이루어냈다"고 강조했다. 엔비디아가 "궁극적으로는 경쟁상대가 될 수 있다"는 각오다. (산업부 서영태 기자)

ytse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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