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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세연의 프리즘] 꼬리와 몸통

2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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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돌아다니는 괴담이 있다. '인천공항 환전 일시 중단.'

공항 달러 환전 환율이 1,600원을 넘어서 달러가 동났다는 내용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선 뒤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잠시나마 혹했다. 그만큼 1,500원이라는 숫자가 주는 공포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환율 1,500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집단적 기억이 새겨진 상징이다. 1997년 환율은 2,000원 직전까지 치솟았고, 2009년에도 1,600원에 육박했다. 환율 급등은 곧 국가적 위기와 동의어였다.

당시 실제로 달러가 부족했다. 외환보유액은 바닥을 드러냈고 기업들은 연쇄 부도에 내몰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전 세계 금융시장이 얼어붙으며 달러 유동성이 증발했고, 신흥국 자산에서 자금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환율 급등은 위기의 결과였고, 동시에 위기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시장에는 오랫동안 일종의 금기가 있었다. 환율 1,500원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믿음이다.

지금 우리는 그 선을 넘어선 채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이유다. 지금의 1,500원은 과연 1997년과 같은 의미일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숫자는 같지만 배경은 전혀 다르다.

IMF 시절 한국의 문제는 달러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달러가 너무 많이 움직인다는 데 있다.

올해 한국 경제는 AI 투자 붐과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최대 수혜국 가운데 하나가 됐다. 수출은 사상 최고 수준이고 경상수지 흑자도 확대되고 있다. 한국은 이미 대외자산이 대외부채를 넘어선 순채권국이다. 외환보유액 규모 역시 과거 위기 국면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환율은 오른다.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달러가 넘쳐나는 나라의 통화가 왜 약세를 보이는 걸까.

고환율 계속

(영종도=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미국 금리인상 전망과 미·이란 종전 불확실성 속에 고환율이 지속되는 가운데 9일 인천국제공항 내 은행 환전소에 실시간 원/달러 등 각국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2026.6.9 hwayoung7@yna.co.kr

그 이유는 한국 경제의 몸집이 너무 빨리 커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금융시장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자산시장의 팽창이다. 반도체 호황과 기업가치 상승으로 국내 증시 규모가 커졌고, 외국인이 보유한 한국 주식 가치 역시 급증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차익을 실현하거나 포트폴리오 비중을 조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 주식을 대거 팔았지만 빠른 주가 상승에 따른 지분 가치 상승 효과가 이를 압도했다. 환위험을 줄이기 위한 환헤지 수요도 함께 발생한다. 과거라면 시장이 충분히 흡수했을 흐름이 이제는 환율을 크게 흔들 정도의 규모가 된 것이다. 외국인들은 달러-원 스팟 시장과 NDF 시장에서 동시에 환율을 끌어올리고 있고, 외환시장은 이를 소화하느라 진통을 겪고 있다.

환율 상승 국면에서 국내 수출업체와 국민연금, 서학개미 등 국내 플레이어들이 달러 공급 확대, 달러 수요 축소에 협조했지만, 해외 플레이어들의 차익실현과 리밸런싱, 환헤지에 따른 달러 수요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산시장의 몸집이 커지는 속도를 외환시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최근 외환당국이 역외 NDF 시장을 예의주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결제와 글로벌 북 관리가 쉽고, 인프라나 24시간 움직임에서 익숙한 데다 익명성, 포지션 유연성까지 갖춘 NDF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주식 익스포져 환헤지에는 NDF가 적합하다.

당국은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고 지적한다. 역외 시장의 투기적 거래가 국내 환율을 과도하게 움직인다는 의미다.

실제로 NDF가 변동성을 확대할 수 있지만, 최근 환율 상승을 모두 NDF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NDF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물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몸통 자체가 과거보다 훨씬 거대해졌다는 사실도 함께 봐야 한다. 그래서 해법 역시 단순하지 않다. NDF를 규제하거나 특정 거래를 억누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외환시장의 깊이와 유동성을 키워야 한다. 정부가 외국 금융기관의 시장 참여를 확대하고 거래 시간을 연장하며 역외 거래를 역내로 흡수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환율 1,500원은 여전히 불편한 숫자다. 수입 물가를 끌어올리고 시장 불안을 자극한다. 결코 가볍게 볼 일도 아니다. 다만 같은 숫자라도 의미까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1997년의 1,500원은 달러가 없어 생긴 숫자였다. 국가의 지급 능력 자체를 의심받던 시절의 숫자였다. 반면 지금의 1,500원은 자산과 자본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마찰의 숫자에 가깝다. 위기의 흔적이라기보다 성장의 후유증에 더 가깝다.

외환시장을 둘러싼 불안이 커질수록 우리는 자꾸 꼬리에 시선을 빼앗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몸통이다. 지금 환율이 말해주는 것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한국 경제와 금융시장의 규모일지 모른다. (경제부장)

sykwak@yna.co.kr

곽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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