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재명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마치고 남긴 후일담에서 가장 눈길을 끈 장면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부 골프 회동' 제안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8일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과 찍은 '셀카'를 올리며 만찬 뒷이야기를 전했다.
"어제 만찬 때 골프 얘기를 하며 우리 부부와 골프를 함께 하겠다고 해 아내가 손가락 걸고 약속받았는데, 오늘 오찬 후 헤어지면서 다시 골프를 꼭 함께 하자고 하셨다"
한 차례 덕담으로 끝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만찬장에서 한 번, 정상회의 마지막 오찬 뒤 또 한 번 골프를 언급했다. 이 대통령도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외교가는 이 장면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골프는 취미를 넘어선 정치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업가 시절부터 골프장을 사교와 협상의 공간으로 활용해 왔다. 백악관 입성 이후에도 골프는 정상과 기업인, 정치권 인사들과 관계를 다지는 주요 수단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고(故)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다.
아베 전 총리는 2016년 트럼프 당선 직후 미국을 찾아 관계 구축에 나섰다. 이후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와 일본 골프장에서 여러 차례 라운드를 함께했다. 외신들은 이를 '골프 외교'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평가했다. 통상 갈등과 안보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두 정상의 개인적 신뢰가 완충장치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최근 유럽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를 치며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현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유럽 외교가에서는 스투브 대통령을 트럼프와 가장 원활히 소통하는 유럽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골프 외교는 라운드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른바 '골프 선물 외교'도 확산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퍼터를 선물했다. 최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도 아베 전 총리가 사용했던 퍼터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아베와 트럼프가 쌓았던 골프 외교의 상징을 다시 꺼내 든 셈이다.
우크라이나와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 각국 정상과 지도자들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골프채와 퍼터, 골프공 등을 선물하며 관계 구축에 공을 들이고 있다. 트럼프 시대에 골프는 스포츠를 넘어 외교의 공용어가 되고 있다.
기업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일론 머스크 등 주요 기업인들과 골프를 매개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정책 결정권자와 기업인의 비공식 네트워크가 페어웨이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모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관세 정책과 대미 투자 확대, 첨단산업 공급망 재편이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이들의 골프 회동은 단순한 친목 행사가 아니었다. 재계 안팎에서는 미국 정부와 한국 기업 간 비공식 소통 채널이 가동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골프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적인 관계 구축 수단이다.
그는 프로골퍼 타이거 우즈와 오랜 친분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PGA투어와 LIV골프 통합 논의 과정에서 백악관 회동을 직접 주선하기도 했다. 당시 회동에는 PGA투어 커미셔너 제이 모너핸과 사우디 국부펀드(PIF)를 이끄는 야시르 알루마이얀도 참석했다. 골프장이 스포츠 공간을 넘어 정치와 경제, 투자 네트워크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골프가 외교적 상징성을 갖는 이유는 분명하다.
골프는 통상 4~5시간 동안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경기다. 수행원과 참모가 빠진 자리에서 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정상회담장이나 집무실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다. 골프가 '가장 긴 비공식 정상회담'으로 불리는 이유다.
무엇보다 이번 제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꺼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과거 아베 전 총리가 먼저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가가 관계를 구축했다면,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 대통령에게 직접, 그것도 두 차례 라운드를 제안했다. 외교가가 이 대목에 주목하는 이유다.
한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에게 골프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신뢰를 확인하는 상징적 행위"라며 "실제 라운드가 성사된다면 관세 협상과 방위비, 대북 문제 등 주요 현안에서도 긍정적 분위기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G7 정상회의장에서 시작된 농담 같은 제안은 이제 한미 관계의 또 다른 장면이 될 가능성을 품게 됐다. 이번 '골프 약속'이 한미동맹의 새로운 비공식 채널로 이어질 수 있을까.
때로는 18홀의 페어웨이가 공식 정상회담장보다 긴 대화를 만든다.
jsje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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